언론속의 국민
지리(智異)산 문화권 / 조선일보 칼럼 <만물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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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4-09-22 21:26]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박경리, ‘토지’) “봉선화가 담장 그늘 속에서 이슬을 머금고 수줍은 분홍 빛깔이었다.”(이병주, ‘지리산’) ▶지리산을 무대로 한 우리나라 대표적 역사소설들의 첫 문장은 우연히도 똑같이 추석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토지’는 1897년 경남 하동군 평사리, ‘지리산’은 1933년의 하동군 어디쯤이다. 뒤이은 문장에서 박경리는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고 썼다. 이병주는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문학이 가능하려면 ‘역사의 그물로도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을 함께 슬퍼해야만 가능하리라 믿는다”고 썼다. ▶지리산을 20번 갔다 온 사람은 지리산 박사가 되지만 200번 갔다 온 사람은 “지리산은 보아도 보아도 볼 수가 없는 산”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있다. 전남·북과 경남 등 3개 도에 걸쳐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등 5개군(郡) 15개면(面), 둘레만 850리에 이르는 산줄기와 계곡에 그만큼 많은 사연과 문화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지리산은 역사요, 문화다. ▶종래 우리나라의 문화권 개념은 강(한강·금강)이나 분지(안동·경주)에 따라 구획되는 게 보통이었다. 산은 오히려 문화 간 소통을 막는 장벽으로 여겨졌다. 지리산만은 예외다. ‘산국(山國)’이란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안에서 풍성한 문화들이 어울려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뤘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한 탐구를 ‘지리산학(學)’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답사과목을 전공 필수로 개설한 국민대 국사학과에서 ‘지리산 문화권’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화제다. 교수와 학생 100여명이 발품을 판 노작이다. “지리산은 단절이 아니라 포옹이며, 영호남이 어우러진 역사의 광장”이란 결론이 반갑다. “지리산 반야봉에 달 떴다 푸른 보름달 떴다/ 서천 서역국까지/ 달빛 가득하니/ 술잔 속에 따라붓는 그리움도 뜨고/ 지나온 길에 누운 슬픔도 뜨고…”(고정희, ‘반야봉 부근에서의 일박’) 어지러운 세상, 이번 추석 연휴엔 만사 제치고 지리산의 품에 안겨보고 싶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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