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문인의 기품 담긴 도산서원도… 산과 물줄기 휘감은 맑은 필치 / 김한들(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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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강세황과 도산서원 / 와병 중인 이익의 부탁으로 완성 / 멀리서 바라본 탁영담과 반타석 / 섬세하고 미묘한 감각 돋보여 / 中 화풍 남종화 받아들였지만 / 조선의 시대정신과 개성 반영 / 김홍도·신위… 최고 화백 제자로 / 가난 속에서도 평생 작품 활동 / 66세에 영조 배려로 관직 올라 / 76세때 금강산 유람 후 생 마감 ▲도산서원 전경.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김진영 제공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린 한국의 서원 계절은 항상 예상보다 빨리 지나간다. 아직 붉은 잎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또 이렇게 한 계절이 지나가고 새로운 계절을 맞아야 하는 시간이 왔다. 이런 시간의 한가운데 서 있다 보면 바쁜 일상에 놓친 것들이 떠오른다. 여유로울 법한 주말에도 피로를 핑계로 흘려보낸 것들이다. 이번 가을에 흘려보내어 아쉬운 것 중에는 안동으로의 여행이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있는 고장이다. 안동 곳곳을 거닐다 보면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이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공자는 선비 정신을 ‘사무사(思無邪)’, 즉 ‘어떠한 사악한 생각도 안 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느리게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정말 이로운 생각만 떠오를 것 같아 선비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지난 7월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꼽은 서원 9곳에 든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 안동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했다. 결국 가지 못한 지금 꺼내어보는 것은 강세황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다.
#강세황이 그린 한국적 남종문인화 강세황(1713~179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 그리고 평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713년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재능이 뛰어났다. 8세 때 시를 짓고 13세부터는 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얻어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20대에 들어 서재에 ‘산향재(山響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방안 네 벽에 산수를 그렸다. 자기만의 분위기를 갖추며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부터 문인화의 세계를 지향했다. 그리고 중국의 화풍 중 하나인 남종화법에 기반을 두고 수련했다. 문인적 교양을 수반한 표현을 잘 그리는 기교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수묵과 담채로 이를 표현하기 위해 앞 시대의 명작을 따라 그리며 기법을 터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열린 자세로 임하였고 자기만의 견해를 쌓았다. 남종화의 본질적 정신을 지키면서도 시대성과 개성을 반영했다. 그의 그림을 두고 한국적 남종문인화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렇게 그가 한국적 남종문인화로 담은 소재는 매우 다양하다. 작업 초기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국조서법(國朝書法)’ 뒤에도 산수도와 매화도가 함께 존재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생애와 화풍을 중심으로 크게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시기에 다양한 소재를 공통으로 다루었다는 특징이 있다. 무슨 소재를 다루든 전신사조(傳神寫照), 대상의 겉모습과 정신을 담아내는 원리가 작용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평생을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그 사이에 김홍도, 신위 등 당대의 유명 화가들을 제자로 가르쳤다. 벼슬을 하고 관계에 진출한 것은 60세가 넘어서였다. 영조의 배려를 거절하지 못하고 정계로 나가게 됐다. 66세에는 장원급제하였으며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시, 서, 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76세 때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기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송불로 학록제명(蒼松不老 鶴鹿齊鳴)’, 여덟 글자를 남기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는 뜻이다. #와유(臥遊)와 사의(寫意)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 그의 작품 세계 속에는 와유와 사의가 모두 있다. 와유는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그림을 펼쳐놓고 산수를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 모든 장소를 가볼 수는 없겠지만 마음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는 의미다. 사의는 사물을 빌려 생각을 담아내는 화법이다. 겉모습은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면 결국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모든 소재와 주제에 뛰어나기는 어렵다. 신위가 조선 시대 사대부 중 강세황을 우리나라 사생의 독보적 존재라고 찬사한 이유다. 앞서 언급한 ‘도산서원도’는 강세황이 1751년에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다. 보물 52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문인과 제자들이 세웠다. 1574년 안동에 세워진 이곳은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강세황은 도산서원과 인연을 맺은 적은 없었으나 병중인 이익의 부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강세황은 이익과 교류하며 실학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익은 퇴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본받아 평생 학문을 닦았다. 그림은 도산서원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중심에 두고 멀리서 바라본 장면을 담았다. 도산서원 앞쪽에는 탁영담(濯纓潭)과 반타석(盤陀石)이 보인다. 도산서원 앞에 강물이 맑고 깊은 담을 이루는 모습을 탁영담이라고 부르고 그 중간에 넓게 자리 잡은 바위의 이름이 반타석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분천서원, 애일당 등 주변 장소가 그려졌다. 인상 깊은 것은 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과 물줄기가 휘도는 강의 풍광을 담아낸 선이다. 마치 천의 올을 풀어놓은 듯 섬세하면서도 미묘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맑은 필치로 표현한 이것은 속기 없는 깨끗한 분위기를 전한다. 그림의 왼쪽에는 강세황이 쓴 발문이 적혀 있다. 여기에는 이익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이야기와 현지답사 내용 및 자신의 소감 등을 자세히 적었다. 자신의 소감은 산수에 관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림은 산수보다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크기 때문이다. 또 실지의 진경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닮게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실경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실제와 다른 것을 숨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해당화도(海棠花圖)’는 꽃을 그린 그림이다. 대각선을 중심축으로 해당화 가지가 뻗어 나가고 있다. 그 주변의 사선과 여백에서 밀도가 느껴진다. 구도를 운영하는 뛰어난 감각을 알 수 있다. 가볍게 그린 듯하지만 필묵은 운치를 뿜어낸다. 문인화가 최고의 가치인 담박과 소쇄한 기운이 전반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문인화의 소재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화훼를 비롯하여 문방구, 악기 등을 그리기도 했다. 다만 정신과 실물을 옮겨내는 것에 집중하고 수련했다. 그러나 사군자를 다룰 때 그 저력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산수를 그릴 때처럼 사군자를 그림에도 자기 견해를 가지고 노력했다. “반드시 난과 죽의 참 모양을 익히 보고, 널리 옛사람들의 유적을 보고, 겸하여 모사하는 공부를 오랫동안 쌓아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공부하는 사람의 지식이 깊고 얕음과 필력의 강약에도 관계된다.”
#강세황이 남긴 글과 도산서원 강세황은 산수와 사군자에 관한 생각에서 보이듯 자기만의 사고를 가졌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공부하며 얻은 이론에 타고난 감상안을 더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살아생전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김홍도의 그림에 강세황의 평론이 있는 작품은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 평론가로 자리 잡은 일은 흔치 않지만, 그는 조예 깊은 문장과 남다른 기억력으로 서화평의 경지를 개척했다. 이번 가을에는 도산서원에 가지 못했지만, 내년 가을에는 꼭 가보려 한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 서원에 관한 식견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강세황처럼 끝없는 공부와 수련을 통해 나만의 감상안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서다. 여름에 방문해 탁영담의 푸른빛을 함께 즐기는 편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야 겨울은 자기 초입에 들어서고 있는데 따듯한 계절 생각이 간절하니 큰일이다.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한파가 찾아오는 일이 드물기를 바라본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원문보기: http://www.segye.com/newsView/20191127517273?OutUrl=naver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본교 소속 구성원이 직접 작성한 기고문이기에 게재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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