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란코프의 북한이야기]김일성 우상화로 얼룩진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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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4-11-29 19:21] 북한 책을 보면 북한의 역사는 모든 게 김일성 주석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돼 있다. 9월 9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신 날’이요, 10월 10일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노동당을 창립하신 날’이다. 어쩌다 해외에 나가 옛날 북한 신문을 보게 된 북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던 내용들을 접하고 매우 놀란다. 옛날 신문에 북한의 주요 인물로 나온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 그들이 ‘김일성 주석’만이 가질 수 있는 당정 요직의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김일성 1인 독재 체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최근 남한 학계에는 김일성을 처음부터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일부 있다. 오랫동안 김일성을 평가절하해 온 반공 정부의 공식 입장에 대한 반작용이겠거니 생각하다가도 씁쓸한 마음이 든다. 1945∼48년 자료를 보면 김일성은 결코 북한의 유일 지도자가 아니요, 북한 공산당의 첫 지도자도 아니었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생겼을 때 그 책임자는 김일성이 아니고 1930년대의 혁명가인 김용범이었다. 오늘날 북측 문건은 이 사실은 감춘 채 북조선분국을 독립정당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 이름을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로 고치고 창립일도 10월 13일에서 10월 10일로 바꿨다. 하지만 1946년 봄까지 북조선분국은 서울에 중앙위원회가 있는 조선공산당, 즉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의 소속임을 인정했다. 김일성이 1945년 9월 귀국 초기부터 북한 정권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1946년 2월 8일 설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는데, 이는 나중에 내각 수상의 길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레닌주의 국가의 핵심인 공산당에서는 그는 최고 책임자가 아니었다. 1946년 8월 소련의 지시에 따라 신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이 만들어졌을 때 그 위원장은 연안파 출신 혁명가이자 국어학자인 김두봉이 맡았다. 김일성은 부위원장이었다.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이 남조선노동당을 흡수한 뒤에야 김일성은 최고위직인 위원장을 맡았다. 김일성은 북한의 첫 국가 원수도 아니었다.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두봉이 국가 원수 역할을 거의 10년이나 했다. 나중에 김일성(지금은 김정일)의 전유물이 된 신년사는 1954년 이전까지는 김두봉이 발표했다. 그는 1957년 말 숙청당할 때까지 국가 원수로 남아 있었다. 김용범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거의 확실했지만 1947년에 죽었기 때문에 지금도 혁명열사 대우를 받고 있다. 물론 지금의 북한은 그가 북한 최초의 공산당 최고책임자였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영원한 주석’으로 묘사되는 김일성이 소련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1950년대 말까지 김일성은 ‘동등한 자들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였을 뿐이다. 최근 남한에선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그동안 역사 왜곡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한에서는 과거의 진실을 알려고 하면 누구나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의 진실을 알 방법이 없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역사학 anlankov@yaho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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