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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임시정부 - 도산과 민족유일당 운동/ 장석흥(국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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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이념 떠나 獨立위해 대동단결을"
[조선일보 2005-02-15 17:47]







[실록 대한민국임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1부 (6)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향하여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 제창



[조선일보]


1926년 7월 8일, 중국 상해(上海)의 삼일당에서 열린 연설회. 도산(島山) 안창호가 입을 열어 ‘민족유일당’ 결성을 제창했다.


“지금 혁명을 공산주의로 하자! 무정부주의로 하자! 복벽(復?·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름) 운동을 하자! 하여 각각 자기의 의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는 ‘민족혁명’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대혁명적 조직’을 성립한 후에 일치적 행동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私利)에 부치지 말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일주일 뒤 삼일당에서 열린 6·10 만세운동 기념 연설회에서도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민족적 통일기관의 성립을 역설했다.


‘민족혁명’이란 각 독립운동 세력이 정치·경제·종교적 이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일제의 압박에서 민족의 자유를 찾자는 것이다. ‘대(大)혁명적 조직’은 민족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체를 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쇠퇴한 임시정부의 기능을 대신할 민족적 통일기관을 세우자는 것이기도 했다. 안창호는 민족 당면의 최대 과제는 조국 독립인 만큼 일단 독립을 달성한 뒤, 정치 사상의 논쟁은 해방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쏟아 붓자고 강조했다.


안창호의 이 같은 주장은 국내외 민족운동계의 커다란 호응을 얻었고, 민족유일당운동은 1920년대 후반 독립운동계의 가장 큰 과제로 부상했다.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이 수용되면서 한국 민족운동계는 다원화된 방도로 민족 독립을 모색해 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 세력 간에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민족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한 노력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래 줄곧 시도됐다. 이는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및 워싱턴 체제 등으로 재정비된 1920년대 중반의 국제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공고히 유지되던 시기였다. 식민지 해방 운동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안창호의 연설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민족유일당운동은 중국 관내와 만주 등 해외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이라면 어디든지 전개됐다.


중국 관내에서 전개된 대독립당촉성회운동, 만주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촉성회와 삼부(三府) 통합운동, 국내에서 추진한 신간회 운동 등이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이들은 각기 주·객관적 조건이 달랐던 관계로 통일된 명칭과 방식을 따를 수 없었지만,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며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해 갔다.



먼저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가 1926년 8월 북경의 원세훈(元世勳)을 찾아가 민족대당을 결성하기 위한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그해 9월 ‘민족혁명의 유일전선을 작(作)하라’는 구호와 함께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우선 지방별로 촉성회를 설립한 뒤 그 대표들이 유일당 조직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1927년 3월 상해에서 150여명의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창립되었고, 대표직은 조선공산당 출신 홍남표가 맡았다. 그리고 24명의 집행위원에는 임시정부 국무령인 백범(白凡) 김구를 비롯하여 임시정부 국무위원 6명 전원도 참가하고 있었다.


북경촉성회 성립 이후 임시정부도 체제 유지를 위해 대처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전 민족사회로 파급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외면하고는 임시정부의 유지는 물론 내각조차 조직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1926년 12월 13일 국무령에 취임한 백범 김구는 민족유일당운동의 흐름에 맞춰 개헌을 추진했고, 1927년 2월 15일 3차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개헌의 핵심은 ‘이당치국(以黨治國)’이었다. 최고 권력을 정부보다 ‘당(黨)’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노선이다.


그리고 최고 권력인 민족유일당이 결성되면, 그 당으로 임시정부를 유지해 나가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이 상해촉성회에 참가한 것도 같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경과 상해의 움직임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7년 5월에는 광주(廣州)에서 의열단의 주도로 170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독립당광동촉성회가, 7월에는 무한(武漢)에서 한국유일독립당무한촉성회가, 9월에는 남경(南京)에서 한국유일독립당남경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지방별 촉성회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1927년 11월에는 상해에서 중국 관내(管內) 지역 연합체인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가 탄생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을 한걸음 진전시켜 나갔다.



3·1 운동이 종교 이념을 초월했다면,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은 정치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운동세력이 연대해 갔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또한 국내외 광범한 지역에서 민족운동세력이 서로 긴밀하게 유기적 관계를 이루며 전개한 민족유일당운동은 1920년대 한국독립운동의 역량과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추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긴 했지만 민족유일당운동은 1930년대 후반 민족통일전선운동과 1940년대 좌·우 연합의 임시정부 성립, 건국강령 수립의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


(장석흥·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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