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알면 the 이로운 역사] ⑭독립운동, 4세대에 걸쳐 싸우다 / 장석흥(한국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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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전쟁을 신호탄으로 1945년 광복까지 50여 년간 전개됐다.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도 5백만 명이 넘었다. 한인이 있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어디든지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천 개의 비밀단체, 만세운동, 농민·노동·여성의 대중운동, 학생운동 등 각 부문에서 민족총력적으로 전개했다. 만주에서는 서·북간도의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수많은 독립군 단체가 세워졌고, 중국의 상하이와 충칭 등에서는 임시정부가 활약했으며,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재정을 지원했다. 독립운동에는 국경이 따로 없었다. 독립운동의 양상도 지역의 조건과 특성에 따라 다양한 세계적 공간성을 지녔다. 독립운동의 특성과 발전적 현상은 참가 주체의 세대별 변천을 통해 보다 뚜렷해진다. 4세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동력이 충원됐던 사실은 한국 독립운동의 특질을 말해주고 있다. 1894년 의병전쟁에 참가한 1세대를 비롯해 2세대, 3세대, 4세대가 뒤를 이으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세대별 양상도 주‧객관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의 학문과 사상, 민족애는 그칠 줄 모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력으로 이어졌다. 그만큼 폭이 넓고 깊은 한국 독립운동이었다. 1세대는 대체로 1850년대 전후 출생자들, 2세대는 1870년대 전후 출생자들, 3세대는 1900년 전후 출생자들, 4세대는 1920년 전후의 출생자들이었다. 1세대가 살았던 시대는 반봉건과 반외세의 중층적 과제를 풀어야 하는 변혁적 상황에서 복잡한 인적 구성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연령의 폭도 넓었다. 이들은 구시대에 태어나 전통 학문을 익히며 구시대적 안목에서 망국의 변을 극복하려는 의병과 동학농민전쟁(후기), 신문명을 받아들이며 개화개혁운동을 벌인 주인공들이었다. 의병 인사로는 최익현(1833∼1906), 유인석(1842∼1915), 이범윤(1856∼1940), 동학출신으로는 박인호(1855∼1940), 손병희(1861∼1922), 개화개혁운동으로는 서재필(1864∼1951), 오세창(1864∼1953)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손병희·박인호·오세창 등은 3·1운동을 기획에 참가했으며, 서재필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2세대는 구시대에 태어나 전통 학문을 익히다가 청년기에 신문명을 수용하면서 구시대와 신시대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세대의 의병이나 동학과 달리 근대적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간 주체였다. 이들 2세대는 신민회 이래 독립운동계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1910년 망국 당시 장년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이끌며 신민회·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군·해외 한인사회 등의 지도자로 활약한 인사들이다. 이동녕(1869∼1940), 이동휘(1873∼1935), 김구(1876∼1959), 안창호(1878∼1938), 김동삼(1878∼1937), 안중근(1879∼1910)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의 길선주(1869∼1935), 양전백(1869∼1933), 불교의 한용운(1879∼1944) 등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는 김구처럼 소년 시절 동학농민군이나 의병에 참가한 경우도 있으나, 러일전쟁 전후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근대적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2세대에서 주목할 것은 구시대의 평민 출신들이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던 사실이다. 설령 양반 출신이라도 독립운동을 통해 양반 의식을 떨쳐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한국 독립운동은 평민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3세대는 신시대에 태어나 어려서 신학문과 신사상을 접했으며, 소년기에 나라를 잃는 쓰라린 비극을 경험했다. 이들은 식민지 체제에서 민족말살을 강요한 식민교육을 받으면서도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3·1운동 당시 20세 전후의 학생·청년으로 성장하며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 3·1운동이 민족총화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에는 3세대의 역할이 컸다. 독립운동의 오랜 경력을 지닌 노장년층의 1,2세대가 지도층을 맡고, 신진세대로서 3세대의 청년과 학생들이 앞장서면서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갔던 것이다. 1·2·3세대가 어우러진 3·1운동은 민족역량을 아우르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분수령이 될 수 있었다. 4세대는 1940년대 전시체제에서도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을 벌이던 학생들, 광복군 등 해외 독립군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이었다. 제2의 광주학생운동을 일으킨 무등회, 안동농림학교의 결사대. 부산의 순국당 등 학생운동의 주체들과 광복군에 참가한 장준하(1918∼1975), 김준엽(1920∼2011), 조선의용대의 김학철(1916∼2001)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독립운동은 광복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전개된 지속성을 지녔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도 있지만, 오히려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1세대 의병의 아들인 2세대가 계몽주의로 전환해 독립군으로 발전해 간 일이 있었고, 손자인 3세대는 사회주의 사상에 의거해 독립운동을 꾀하기도 했다. 또 독립운동을 위한 길이라면 사상적 전환마저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회영·신채호 등과 같이 유림 출신의 인사들이 청년시절 서구적 근대 사상을 받아들여 계몽주의로 전환했다가, 다시 아나키즘과 같은 신사상을 받아들이며 독립운동의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또는 안중근처럼 계몽주의로 출발했다가 의병으로 전환해 간 사례도 있었다. 이념과 방략의 다양한 변천을 통해 독립운동을 발전시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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