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책과디자인/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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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제는 잊힌 풍경의 서정성과 장식성의 즐거움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의 극심한 문화 탄압 속에서, 기술의 열악함과 종이난, 검열난 속에서 탄생됐다는 것에서 그 의미가 더해진다. |태극과 오얏, 지도의 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잡지로 인정되는 『소년』(신문관, 1908)에 쓰인 월계수 문양은 로마의 황제 시저의 심벌이었고, 1896년 아테네 최초의 올림픽 때 포스터에서 승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승리자로 소년을 호명하고 태극을 중앙에 병치한 레이아웃에서 민족 계몽자 육당의 문화기획이 잘 드러난다. 『공수학보(共修學報)』(공수학회, 1907)는 일본으로 유학 간 관비 유학생들이 발행한 학회지로, 오얏꽃이 양쪽으로 피어나고, 태극, 건곤이감의 사괘가 배치되어 있다. 책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은 아르누보 양식의 문양으로 유럽에서 일본으로 수입된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까지 수많은 변형을 거치면서 사용된다. 근대 초기의 이 두 잡지 표지는 디자인적 감각과 더불어 상징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표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몽과 애국적 감성만이 일제 강점의 모진 세월을 버티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합방 후에는 정치색이 들어간 책들은 검열 대상이 되고 교육서, 기술서, 대중발간물 등이 주로 출판됐다. 이 시기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오락거리는 후에 딱지본이라 불리는 이야기책으로 조선의 구전이야기나 신소설을 엮어낸 것이었다. 신국판 사이즈의 작은 판형, 울긋불긋한 표지에 큼지막한 활자가 특징으로, 내용이 그렇듯이 표지 역시 감성이 넘쳐나는 신파적 장식의 특성을 보인다. |장식성과 초 모던 감각의 대조|
신소설 『목단화』(광학서포, 1911)에는 민화나 자수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목단이 크게 흐드러지고, 사방을 길상무늬가 둘러싸고 있다. 정교하게 다듬은 맛보다는 무심하게 그려 넣은 듯한 터치로, 당시 일본에서 인쇄된 소설 『불여귀』(동경경선사,1912)와 대조되는 감각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 최남선이 국수 한 그릇 값이었던 육전으로 출간한 시리즈물 ‘육전소설’ 『심청전』(신문관, 1913)은 또렷이 도안화된 꽃문양과 덩굴줄기, 고딕체 제목의 표지를 선보인다. 이는 당시 미국에서 발행된 롱펠로의 시집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표지들은 동일 대상이라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 그 표현 양식이 상이하고, 그들이 또 다른 미감을 형성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남선의 시리즈물 ‘육전소설 김용준 디자인의 정지용의『문화독본』(1949) 장식성의 대척점에 초 모던 감각의 표지들이 있다. 이 중 최고봉은 역시 이상이 디자인한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장문사,1935)이다. 근래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이 해석할 수 없었던 은색과 검은색의 수직선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형상화한 것이다. 정현웅이 디자인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대동출판사, 1938)은 근대기 최고 다작의 디자이너 정현웅의 작품으로 댄디스트 박태원의 소설을 모던하게 형상화했다. 장만영 디자인의 김철수 시집 『추풍령』(산호장, 1949) 또한 빼어난 절제의 감각을 보여준다. |전통 표상과 풍경, 이념의 파노라마| 길진섭 디자인의 정지용 시집 『백록담』(1943)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신석초 시집 『석초시집』(1946) 1946년 희곡집 『뇌우』 조선일보사 여성종합잡지 『여성』(1936) 창간호 전통 표상을 잘 다듬어서 내놓은 표지도 한 갈래를 차지한다. 김용준 디자인의 『조선문학정화』(인문사, 1947)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제목을 조촉(照燭: 전통기 때 밤 연주 시 불을 밝히던 등)에 넣었는데 타이포그래피에 색채 사용이 많이 섬세한 연유인지, 발간 당시 ‘미장본(美裝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정지용의 『문학독본』(문장사, 1949) 또한 근대 초기의 흐드러지던 장식성을 잘 정돈한 조선 아르누보의 수작이다. 서정적인 풍경 또한 큰 비중으로 근대기 내내 주로 시집의 표지로 사용됐다.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문장사, 1943)은 정지용의 친한 친구 길진섭이 디자인한 것으로 백록담에서의 쓸쓸함을 앞표지와 뒤표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슴들로 표현했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신석초의 『석초시집』(을유문학사, 1946) 또한 내면의 서정적 풍경을 그려낸 표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시집은 현재 그대로 복간되어 젊은이들의 소장품으로 부활됐다. 이 외에 매란국죽(梅蘭菊竹) 등의 기의는 사라진 채 단지 시각 완상의 대상이 되어버린 다양한 꽃과 나무들, 사회주의 사상을 전달하는 강렬한 표지가 또 다른 흐름을 이룬다. 이 외에 1920년대의 잡지 표지에서는 근대 조선인들의 표상이 다양하고 화려하게 그려진다. 이들 표지는 시서화(詩書畵: 시와 글씨와 그림), 문사철(文史哲: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아직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지식인들의 합작품이기에, 디자인 과정에서 생겨난 더 많은 이야기와 의미가 오히려 표상의 배후를 메우고 있다. 그래서 근대기 책 표지 디자인은 우리 시대의 극히 전문화된 세련된 표지들보다 더 다양한 인간적인 얼굴로 다가오면서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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