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혁명적 백일몽의 표상들, 사회주의 시각 어법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세기말 탄생한 사회주의 사상의 물결은 조선에도 어김없이 흘러들어 1925년 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카프)이 결성됐다. 자본주의를 착취에 기반한 경제구조로 해석하고, 능력과 분배의 평등과 이상향을 주장하는 이 사상은 한편으로는 백일몽적 설렘을 주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이 사상을 현실화하고자 한 러시아 혁명의 목표는 너무도 뚜렷했기에 이를 추동하기 위한 시각 선동 방식 역시 명확하고 확실했다. 조선의 사회주의 표상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서 시각의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조선만의 사회주의 시각 어법을 보이고 있다.

      『공제』(조선노동공제회, 1920)                           ‘제6회 전국 형평사 대회’ 포스터(형평사, 1928)   
                            

노동과 집단, 단결

조선의 여러 계층 중 가장 천하게 대우받던 집단이 백정이었다. 이들의 호적에는 도한(潳漢: 도축하는 남정네)이라는 붉은 표식이 찍혀서 대물림됐고, 비단옷을 살 수도 없었고, 돈이 있어도 기와집에 살지도 못하고, 항상 초립을 써야 했다. 이런 가혹함에 분개한 진주 양반 출신의 강상호와 백정 이학찬 등이 주도하여 1923년 창립한 단체가 ‘형평사’였고 이들은 계급 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교육 균등의 기회 등을 요구했다. 1928년 ‘제6회 전국 형평사 대회’ 포스터에는 흰옷을 입은 남성이 한글 풀어쓰기로 ‘형평’이라고 쓰여진 붉은 깃발을 들고 서 있다. 힘차게 뻗은 손과 굳게 디딘 다리, 깃대의 사선이 역삼각형의 역동성을 보이면서도 형평을 이룬다. 배경에는 인물의 흰색을 강조하기 위한 짙은 푸른색이 쓰였다. 분출되는 운동성, 명확한 메시지만이 부각되는 디자인이다. 특히 술이 달린 깃발 형상은 『공제』 창간호에서도 보이는데 이 표지에서는 대중이 커다란 깃발을 지구에 꽂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깃발의 형식은 조선의 구식군대가 사용하던 ‘휘’라고 불리는 꼬리가 달린 모습을 차용한 것으로 서구의 깃발과 다른 조선적 표상이었다.

 『시가집』(삼천리사, 1929) 표지와 내지                 

 
 
『김영일의 사』(동양서원, 1923)


1929년에 발행된 『시가집』은 이광수, 주요한, 김동환의 시집으로 안석영이 디자인하고, 내지의 삽화는 안석영과 이상범이 그렸다. 표지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일군의 남성들이 곡괭이로 대지를 개간하는 모습이지만, 시에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의 그리움 등이 전개되고, 삽화에는 고개 숙인 여성의 살풋한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전통과 사회주의적 표식, 민족적 감성의 병치들은 당대 지식인들의 혼재적인 존재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표적인 카프 작가 조명희의 희곡집인 『김영일의 사』 표지에는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고흐가 습작 시절 모방하면서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가 그리려 했던 것은 노동이다”라고 한 밀레와 고흐 작품의 노동하는 가난한 인물이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꿈꾸며 죽어간 조선의 가난한 고학생 김영일로 치환된 것은 아닐까.


러시아 구성주의적 어법 차용


『낙동강』(백악사, 1928) 『시대공론』           (시대공론사, 1932.1)                       『대중』(1933.4)

『신여성』(개벽사, 1932.1)

조명희의 또 다른 작품 중 ‘신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산’이라고 평을 받은 그의 대표집 『낙동강』에는 머리와 등에 짐을 지고, 강을 건너는 가족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고, 위아래로 붉은 선이 그려져 있다. 선이나 박스로 이미지와 공간을 분할하는 기법은 당시 러시아의 구성주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혁명정부와 함께 예술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 했던 예술가, 디자이너들은 말 그대로 세계를 구성하고 구축하는 ‘구조주의(Constructivism)’라 불리는 새로운 시각 어법을 창안했다. 다양한 소재의 콜라주 기법과 당대 신기술인 사진 합성, 기하학적인 라인의 배치를 통해 화면을 구성했다. 사진은 특히 사실성이라는 신뢰감을 주면서도 합성을 통해 시각적 환상을 창출할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러시아를 사상적 모국으로 삼고 추종하던 193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 잡지들은 이렇게 러시아 구성주의적 기법을 대거 빌려왔다. 하지만 이미지와 한자 제호, 독특한 활자체의 사용 등으로 조선만의 표정을 드러낸다 영화인 김유영이 무산 계급(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력을 판매해 생활하는 계급)의 정당한 계급 운동을 하겠다고 표방한 『시대공론』의 표지는 카프계 영화인이었던 추적양이 디자인한 것으로 빨간색 배경과 거친 망점의 흑백 사진, 사선의 기하학적 선 등으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특히 손바닥이 전면적으로 보이는 거부의 자세, 외치는 듯한 인물은 1929년 제작된 러시아 영화 〈제국의 잔해〉 포스터와 유사하다. 또한 『대중』의 타이포그래피는 글자 형상 자체가 강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사선으로 배치된 발행연도 등은 조선의 구성주의적 감각을 표출한다. 개벽사가 발간한 여성지 『신여성』에도 여성 노동자의 기표가 등장했다.

해방 후 시각 선동 기법


                  『뇌우』(선문사, 1946)                                         『맑스주의의 원천과 구성』(노농사)

『횃불』(우리문학사, 1946)

 

해방 후 발간된 사회주의 경향의 표지들은 단순한 상징을 사용한 예시가 많다. 중국의 근대 격변기 극을 번안한 『뇌우』의 표지는 강한 붉은 번개를 배경으로 각광(脚光)을 받는 여성 사진이 극적인 효과를 보인다. 대표적인 러시아 구성주의적 어법이다. 화가 이주홍이 디자인한 인민문고 『맑스주의의 원천과 구성』은 싱싱한 보릿단과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결합, 나사로 조여놓은 듯한 제호 박스를 통해 농민과 노동을 동시에 형상화하고 있으며, 또 하나의 그의 작품 해방기념시집 『횃불』에도 별, 군상의 모습이 선으로 정리되어 있다.

『레닌과 노동조합운동』(우리서원, 1946)                               『맑스 엥겔스 예술론』(건설출판사, 1946)        

                                              
이 외에 『미영노동운동소사』, 『레닌과 노동조합운동』의 톱니바퀴, 공장, 굴뚝의 연기는 오로지 노동과 생산을 주축으로 혁명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당대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이다. 박문원이 디자인한 『맑스 엥겔스 예술론』 역시 낫과 망치의 기하학적 형상화를 보인다. 이렇게 사회주의 사상을 대변하며 직설적 화법으로 혁명에 동참했던 시각 선동 기법은 이후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민중미술에서 판화와 콜라주 기법 등으로 부활되어 또 한 번 강렬하고 선동적인 시각적 흐름을 형성했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2107657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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