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기고] 전통과 미래가 담긴 한글 / 김동훈(법대)교수

긴 연휴 끝에 한글날이 붙어 있다. 달력에는 검은 숫자 밑에 조그맣게 표시되어 있어 그냥 넘기기 쉽다. 공휴일을 줄인다는 명분 아래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되었으나 지금이라도 다른 공휴일을 줄여서라도 부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자부심을 갖게 하는 첫 번째 유산으로서 나는 한글을 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직업상 글을 읽고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그 고마움을 더욱 느끼고 있다. 지금 원고를 입력하는 컴퓨터 자판은 왼손으로는 자음을, 오른손으로는 모음을 입력하게 되어 있다. 영문 자판의 어수선함과 비교할 때 이러한 시스템은 효율적인 면에서 거의 환상적이다. 과거 타자기 시대의 받침글쇠 등 다소 불편했던 점은 디지털 시대에 있어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근래 휴대폰 자판에서 모음을 다시 가로획과 세로획과 점의 3개의 조합으로 분해한 것은 더욱 환상적이다. 한글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정보기술(IT) 강국이 되는 데 숨은 공신이 한글이다. 청소년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그 속도와 능숙함을 보면 놀랍다. 이것이 그들 세대에 있어 활발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정보화시대에 새로운 문화창조의 도구가 되고 있다. 같은 한자문화권의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더욱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한글에 대해 우리가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국수적일 필요는 없다. 문자를 언어의 옷이라 본다면 한글은 우리말에 대하여 가장 좋은 맞춤복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같은 한자문화권이었던 베트남을 보면, 원래 ‘쯔놈’이라고 하는 우리의 이두와 같은 문자를 써왔는데, 프랑스 신부가 로마자로 문자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6성이나 되는 성조언어의 특성을 반영하다보니 로마자 알파벳마다 2~3개씩의 꼬리표가 붙어 보기에 상당히 어지럽다. 그 외에도 말레이·인도네시아어나 터키어, 몽골어 등 여러 언어가 고유의 문자에 의한 표기 방법이 있었으나 불편한 점이 많아 근대에 들어오면서 로마자나 키릴문자 등의 알파벳을 차용하여 문자로 삼았다. 우리 선조들이 조선왕조실록 등 방대한 한문기록을 남기면서도 매순간 말과 글의 괴리에서 얼마만한 고통을 겪어왔는가를 생각하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나아가 한글은 수천년 우리 사고의 표기수단이었던 모든 한자에 대해 1 대 1의 대응적인 발음을 준비해두고 있어 한자에 기반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흔히 한글전용으로 인해 전통문화와의 단절을 걱정하지만 고도의 학술적인 내용을 오로지 한글이 가진 풍부한 표음력에 의거해서 표기하고 전달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10~20년 전만 해도 대학교재에 적잖이 한자들이 박혀있는 국한문혼용의 형태가 많았으나 오늘날 한자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법률문장마저도 완전 한글화를 거의 달성하고 있다.


오히려 한글 속에 군데군데 박혀있는 한자들은 한글의 표음력에 의한 전달에 방해 요소가 되는 듯하여, 한자가 섞여있는 글은 시각적으로도 불편함을 준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이 한문표기의 아류에 머무는 것을 보면, 한글은 우리의 독자적 문화를 만들어가는 핵심요소일뿐더러, 표의문자인 한자로 표상되는 문화권과 표음문자인 알파벳으로 대표되는 문화권을 다 아우를 수 있는 더 차원 높은 문화생산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훈 국민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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