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만화가 양영순(시디 48회)
성에 대한 가식·위선 통쾌하게 벗겼다 ⑧ 양영순 (1971년생)



어떤작품그릴래 선생님 질문에 "섹스·폭력 난무하는 만화 그릴래요"

심상치않던 '문제학생'…'누들누드''아색기가'로 대한민국 강타






■고정관념의 전복자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이두호 김형배 이희재 등 유명 만화가들이 만화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직접 강의를 맡던 만화아카데미. 수업 중 앞으로 어떤 만화를 그리고 싶은가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시간, 한 지망생이 "저는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만화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아주 희한하고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청중의 웃음이 쏟아졌지만 여기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이 지망생은 동료들이 속으론 자극적인 만화에 열광하면서도 겉으론 매도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자신의 손으로 성에 대한 가식과 위선을 벗겨버리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가 바로 양영순이다.



양영순은 <누들누드>(1995년)로 고정관념의 전복자로 만화계에 등장했다. '누들누드'란 단어는 건전한 성적 상상력이 결핍된 대한민국 사회의 밑바닥에, 물줄기가 말라 갈라진 논바닥을 헤집고 다니듯 활력을 불어넣었다. 성을 소재로 한 성인만화를 그리면 3류 포르노 정도로 취급하던 사회 분위기에선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대한민국 남성이면 머릿 속에서 한 번쯤 떠올려 보던 야한 상상이 이토록 위트 있게 표현되다니. 이야기의 결말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반전이, 크로키처럼 순간을 거칠게 포착하면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데생이, 대사가 거의 없이 그림으로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전개 방식이 있다니. 더구나 저속하거나 천박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은밀히 탐닉하면서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앞다퉈 돌을 던지던 성(性)을 우리도 고급스러운 풍자 대상으로, 문화 상품으로 삼을 수 있구나라는 자긍심까지.



만화책으로 불붙은 <누들누드> 열풍은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양영순이 등장했을 때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란 신인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기성 작가들이 그를 대환영했다. 자기 색깔을 투박하게 뿜어내는 그림, 성이란 소재에 대해 우리 사회가 치고 있던 높은 담벼락을 허문 대담함에 반했다고 할까. 작품 의뢰가 들어오면 서슴없이 그를 추천해 앞길을 터주었다.



가끔은 너무 혁신적이고 마니아틱해서(나는 앞서간다고 표현하고 싶다) 대중에게 외면받기도 했다. 연쇄살인마가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유혹한 후 죽인다는 <꽃을 든 남자>(1999년 작)나 초창기 작품 중 빨강머리앤이 어린이들을 엽기적으로 잡아먹는다는 <빨강머리 앤>을 하며 양영순은 '이건 아닌가 봐'라는 고민 및 혼란에 빠졌을 게 틀림없다. 이제 그는 확실히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만화와 대중에게 어필하는 만화를 구별할 줄 안다. 신문 연재 만화 <아색기가>가 그토록 사랑받은 이유 역시 성에 집중했던 <누들누드>의 한계를 벗어나 사회의 모든 가치 체계를 패러디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해냈기 때문이다. 독자의 잠재적 성감대를 톡톡 건드려 주는 재치, 성인만화를 통해 자신만의 철옹성으로 구축한 대담성은 그를 30세 중반에 최고 수익을 올리는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계란과 두부를 극복한 인간 승리


양영순의 대학(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생활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에 집과 학교 왕복 네 시간. 1993년 무렵 하루 종일 만화 연습에 매달렸던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학교 근처 친구의 자취방을 같이 쓰는데 6만 원을 내고 6만 원은 자신의 생활비로 돌렸다. 한 달에 6만 원이라면 하루 용돈 2000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2000원으로 하루 버티기는 사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양영순은 아침은 먹지 않고 아점(아침+점심) 개념으로 학교 식당에서 700원짜리 밥을 사먹었다. 저녁엔 항상 300원짜리 시리얼 초콜릿과 400원짜리 두부 한 모, 하나에 80원 하는 계란을 3~4개를 사서 단백질을 보충했다. 물론 저녁밥 없이. 이런 식으로 8개월 생활했으니 독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밥도 제대로 못 먹던 그가 만화가의 꿈 하나로 벌떡 일어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알뜰살뜰한 그에게 돈도 따라왔다.



학생 시절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어했는데 당연히 집에서는 2남 1녀의 장남이 취직하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무공훈장 소유자였기 때문에 전학기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1990년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 후에도 만화가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제일기획에서 시각디자인 관련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창의적인 작업이 없는 광고 디자이너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대신 "네가 실기실에 앉아 있지 않은 날이 학교가 문닫는 날"이라고 선배가 말할 정도로 만화 그리기에 매달렸다. 학보사에 들어가 만평을 맡아 가능하면 만화 경력을 더 쌓으려고 했다.



그는 하루빨리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화계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만화잡지 <주간 만화>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신 그에게 수입이 된 것은 학보사 일이었다. 만평 청탁을 받으며 많은 달은 고료가 18만 원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던 차 행운이 따랐다. 1995년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에 연재용 원고를 갖다 냈는데 마침 이 잡지는 공모전을 진행 중이었고 대상자가 없어 고심하던 차, 응모도 안 한 그의 원고를 대상으로 뽑았다. 대상이라는 전화를 받고 기대한 금액은 30만 원. 잡지사 가서 상금 봉투를 열어 보았는데 500만 원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충격으로 가슴이 철렁한 그는 잡지사에 다시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혹시 잘못 넣은 것 아니냐고.



4월 말의 일인데 그는 부모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다. 혹시 돈을 잃어버릴까 싶어 집 책장 틈에 몰래 돈을 감추고 테이프로 여러 겹 감은 후 5월 8일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드렸다. 감동의 물결이었다. <미스터 블루>에서 페이지당 3만 원, 8장씩 격주로 그리니 한 달 고료가 48만 원이 됐다. 신바람이 난 원고를 1년 한 시점에는 장당 8만 원으로 대폭 인상됐다.



그럼에도 부모님 놀라게 하기는 계속됐다. 고료를 학교 다니는 동생이나 할머니 용돈으로 써 부모님이 들여야 하는 돈을 우회적으로 막았다. 그게 작업을 하는 기쁨이 됐다. 세간의 화제가 된 <누들누드>로 얼마만큼 돈을 벌었나. <누들누드> 단행본 다섯 권 전부해서 5000만 원, 애니메이션 계약금으로 1000만 원 받았다. 아마 <누들누드>로 양영순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겐 의외의 결과일 것이다. 그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고양시 화정동에 4500만원짜리 전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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