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아카데미 편식증

[한겨레 2005-11-01 18:18]


우리말로 학술원 또는 한림원으로 불리는 ‘내셔널 아카데미’는 어떤 나라나 학문적 업적이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구성되는 최고의 명예 학술기구를 지칭한다. 내셔널 아카데미는 국가의 재정지원과 승인은 받되 운영은 독립적이며, 해당 국가의 연구활동을 조정하고 학술진흥정책에 대한 자문기능 등을 수행하면서 특히 국가간 학술 교류·협력의 대표 역할을 담당한다. 며칠 전 우리나라 공학 분야의 아카데미인 한국공학한림원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이외에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아카데미로는 학문 전 분야를 망라하는 대한민국학술원과 이·공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있으며, 이들은 이미 작년에 각각 설립 50주년과 10주년을 맞았다.

문제는 이 세 아카데미가 서로 유기적 관련을 맺거나 보완적인 구실을 하기보다는 중복적이고 배타적이며 학문분야 면에서도 심한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학술원은 인문·사회과학부 75명, 이학·공학·의학 등 자연과학부 75명의 학계 원로들로 구성되어 그 학문분야 면에서는 균형과 대표성을 갖추고 있지만, 폐쇄적인 회원 구조와 정부지원 미흡으로 인해 활동이 침체되어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10여년 전에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한국공학한림원이 각각 과학기술부와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탄생하게 되었는데, 전자는 이학·공학·의약학·농수산학 등 과학기술 전 분야를, 후자는 공학 분야만을 포함하되 학계 회원과 산업계 회원 반반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아카데미는 이·공학 분야로만 치우쳐 있을 뿐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사실상 외면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얼마나 불균형한 것인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영국은 과학 분야에서 왕립학술원이 세계적으로 저명하지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는 그에 못지않은 브리티시 아카데미가 있다. 프랑스에도 과학아카데미 외에 인문학아카데미와 사회과학아카데미가 별도로 존재한다. 미국에는 국립과학아카데미 안에 사회과학 분야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일본학술회의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북한에는 과학원과 별도로 사회과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공학과 인문·사회과학은 균형적 지원을 받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무현 정부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이슈 중 하나는 ‘이공계 위기’이지만, 사실상 아예 ‘위기’라고 비명조차 못 지르는 비참한 상황에 처한 것이 바로 이 나라의 인문·사회과학이다. 학문의 후속세대가 끊어져가는 것을 보는 지금, 나는 도대체 우리나라에 인문·사회과학 정책이란 게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부와 국민은 이·공학과는 달리 경제성장에 기여를 못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나 경각심을 보이지 않는다. 문화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자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반드시 요청되는데, 과연 문화와 민주주의를 소홀히 하고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21세기의 올바른 국가전략이 될 수 있을까?

학문의 가치를 성장에 대한 기여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학문 분야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공학만 비대해지고 인문·사회과학은 왜소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학문적 기형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이는 민주주의를 심화시킴으로써 통일시대에 대비하여야 할 지금의 국가적 과제도 외면하는 셈이 된다. 이제 우리나라의 학문도 불균형 성장을 지양하여 균형성장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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