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6-03-30 18:24] [한겨레] 그동안 과학기술은 우리나라 안에서 정치적·이념적 차이와 무관하게 합리성의 화신이자 사회진보의 토대로 일반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제도 정치권에서 이러한 사고는 박정희 시대 이래 과학기술은 국가발전의 열쇠이자 이를 위해 존재한다는 ‘과학기술 입국’의 통치이념으로 굳어졌고, 진보 운동권에서도 과학기술은 민족과 노동의 해방을 위한 진보적 생산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산업화 추진과 민주화 운동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수십년 동안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면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쟁점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세력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갈등을 표출해 왔지만, 유독 과학기술 쪽을 두고는 이런 의견의 대립과 갈등이 거의 없었으며, 과학기술의 발전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세력 모두 드물게 사회적 합의를 이뤄 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사회적 합의는 우리 경제가 아직 과학기술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정치 민주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별다른 도전에 직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가 기술 경쟁력을 핵심적 바탕으로 하는 발전단계에 접어들고,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되었던 환경문제가 민주화의 진전으로 시민사회에서 점점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도전받게 되었다. 과학기술은 한국사회가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느냐뿐 아니라, 과연 어떤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근본적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 핵발전, 생명공학, 새만금 개발 등이 국가적 과제이자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는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종말을 고하고 우리 사회에 두 가지의 상반된 선택지를 제시하였다. 나는 이를 잠정적으로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의 길과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의 길로 부르고자 한다.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은 과학 발전의 속도를 높여 선진국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며, 이를 위해 성장을 극대화하는 연구분야와 우수한 연구자를 선택적으로 집중지원하고, 노벨상과 같은 국위 선양에 큰 인센티브를 주면서 연구윤리·생명윤리 등에는 소홀한 발전 중심의 전략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적 과학정책은 과학 발전의 속도를 높이기보다는 환경 친화적인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고, 선택과 집중보다는 균형적 과학 발전을 추구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연구관리와 민주적 연구문화의 실현을 강조한다.
우리가 과학기술 사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체로 이 두 가지 모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황우석에 열광하는 애국주의 과학은 이 중 민족주의적 과학정책 모델과 부합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의 과학 기술화가 진전될수록 두 모델 사이의 갈등은 더욱 뚜렷해지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점점 더 널리 인식·확산될 것이다. 이제 과학기술에 대한 과거의 사회적 합의로 되돌아갈 길도 없지만 또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사실상 민족주의적 과학정책의 압도적 지배로 특징지워졌던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마치 과학기술에 관한 한 대안적 발전경로는 없는 듯이 우리 눈을 가리고 과학기술을 신비화하는 구실을 하였을 뿐, 우리 스스로 모든 대안들을 알고 선택한 진정한 ‘합의’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수·중도·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사회 운동 세력에 황우석 사태는 묻고 있다. “너는 어느 과학 발전의 길을 택하겠느냐?”고.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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