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아침을 열며] 위에서 내려오는 연습, 곰처럼 / 김도현(경영학부) 교수


오래 되었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고위관료와 공공기관 대표를 지낸 분을 알게 되었는데, 이분은 항상 모임이 끝나면 다른 분들을 먼저 보내고 맨 마지막에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나보다 생각했다가 진짜 이유를 우연히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사 딸린 차가 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부끄럽고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높이 올라갔던 탓에 보통사람으로 잘 '내려오지' 못한 이의 슬픈 초상입니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경험을 합니다. 직장에서는 높은 직위를 갖게 되고, 사회에서는 연장자 대접을 받습니다. 모임에서 이른바 상석에 앉게 되고 '한 말씀' 하시라는 요청에도 익숙해집니다. 나이든 사람을 우대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와 조직 내 위계질서가 결합되면 이런 경향은 종종 심각해집니다. 재미 없는 말을 해도 박수가 터져 나오고, 허튼 소리를 받아 적는 부하 직원까지 생깁니다.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행복한 착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사실 제게도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시작한 초기, 학생들이 제 강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경청하고, 객쩍은 농담에도 빵빵 터져 주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제가 꽤 매력적인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시작되었습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젊은 날 그 수많은 실연의 경험은 그저 운이 나빠서 그런 건 가봐. 심지어 걱정도 했습니다. 혹시 나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그럴 때 뭐라고 말해 주어야 상처주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제 책장에 꽂힌 학생 상담 관련 서적들은 그 걱정의 산물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학부생들의 존중과 대학원생들의 친절함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너그럽고 착한 성정과 교수-학생 위계관계가 결합된 덕분이라는 점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매력 없던 남자가 나이 들어 갑자기 매력적이 되는 기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되새기고 있고요.

위로 올라가면서 얻게 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은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주말에 등산 함께 가자는 직장 상사나, 지하철 좌석에 앉은 젊은이를 호통쳐 일으켜 세우는 노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 스스로입니다. 지위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자신의 위대함 덕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가엾게도 존엄을 잃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괴상망측한 행동을 하거나, 힘을 이용해 엉뚱한 것을 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흔합니다.

겨울이 되면 높은 나무에서 일부러 떨어져 보는 곰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겨울잠에 충분한 지방이 축적된 것인지 실험해 보는 것입니다. 남들의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직함을 떼고,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지 가끔씩 실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실 쓰레기를 버리고, 지하철을 서서 타고, 젊은 친구들과 독서 모임도 해보고, 모임에서는 끝자리에 앉고, 커피는 카운터에서 스스로 집어오고…. 이런 일이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몸 속에서 보통 사람의 자질이 사라져 가는 중입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원문보기: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71713270004769?di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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