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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조선 초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 50책 중 41책. 1987년 국민대 사학과에 다니던 한 학생이 이 책을 헌책방에서 발견해 3000원에 샀다. 고려사는 단종 때부터 목판 인쇄돼 수십 질이 전해지는데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중간 중간에 초서나 행서 붓글씨로 된 한문 기록이 빽빽이 담겨 있었다. 학생은 고려사를 전공한 스승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고려사 목판본의 하나로 여겼던 교수는 곧 유려한 필체의 ‘낙서’에 주목했다. 그리고 한문에 조예가 깊은 스승의 도움을 받아 책 첫머리에 ‘안정복인(安鼎福印)’이라는 인장이 희미하게 날인된 것을 발견했다. 박종기(55) 국민대 교수가 최근 펴낸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박 교수의 수중에 들어온 책은 18세기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1712∼1791)의 수택본(手澤本). 수택본이란 소장자의 손때가 묻은 책을 말한다. 안정복이 누구인가. 단재 신채호가 ‘조선왕조 500년 이래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받친 유일한 사학전문가’라고 칭송한 실학자다. 그의 대표작인 ‘동사강목’은 고조선사∼고려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체 17권 중 12권이 고려사를 다룰 만큼 고려사의 보고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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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이 수택본이 동사강목 집필을 위한 기초 자료를 정리한 일종의 연구노트임을 깨달았다. ‘낙서’들은 ‘고려사’에 빠져 있는 관련 정보를 집적해 놓은 것으로 안정복이 고려시대 묘지명과 문집 등에서 발굴한 것이었다. 일부는 동사강목에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박 교수는 나머지 49권의 행방을 찾아 나섰고 올해 초,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28질의 ‘고려사’ 중에서 그 책들을 찾아냈다. 조사 결과 이들 책 대부분에 안정복이 남긴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 41책은 누군가가 ‘고려사’ 원본을 필사해 슬며시 끼워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저 자신이 규장각 연구원으로 3년간 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 옛날 누군가가 술값 삼아 외부로 팔아넘긴 책이 제 손에까지 흘러들어 온 것은 아닐까요.”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박 교수는 “고려사 연구자들이 묘지명과 개인문집을 통해 고증에 나선 것이 1980년대 이후였는데 안정복은 250여 년 전에 이를 철저히 실천했다”고 특정 이념에 입각한 역사 서술에 경도된 우리 역사학계의 반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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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료는 역사연구의 기본은 예나 지금이나 관련 자료들을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 줍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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