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경향신문-목진휴의 눈]‘중간지대’가 없는 사회 / (행정) 교수

개인적인 이유로 더 이상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어떤 라디오방송의 토론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할 때의 일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퇴근시간에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한 주 동안의 정치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소위 진보와 보수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이를 청취자들과 공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스스로는 사안에 따라 자유로운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했지만 적지 않은 청취자들은 필자에 대해 보수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객으로 분류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청취자들은 소위 색깔을 알 수 없는 경우라든지 회색의 영역에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토요일의 여의도 주변은 항상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매우 혼잡한 오후였다. 어쩌다 시간이 늦어져 택시를 이용해 방송국으로 가고 있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시작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로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운전기사에게 생방송에 출연하려고 하는데 시간적으로 매우 촉박하니 이 점을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방 거울을 통해 필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후 기사는 느닷없이 “오른쪽인 것 같아요. 학생들이 힘들겠어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망연자실했던 필자는 굳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대신 “기사께서는 왼쪽에서 보시는 것 같아요. 오른쪽에서 본 분들은 왼쪽이라고 그럽니다. 다음에는 오른쪽에서 한 번 보아 주세요”라고 응답했다. 아마도 택시기사는 진보 입장에서 필자를 보수로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상 필자와 교분을 유지하는 어떤 인사들은 필자를 보수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기사의 도움으로 다행스럽게도 시간에 맞춰 방송에 임할 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때마다 되짚어 보는 ‘오른쪽, 왼쪽’에 대한 고민이다. 세상의 일에 과연 절대적인 입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을 보는 사람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상대적이라고 본다면 일관성이 상실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안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입장이 변한다는 기회주의 또는 사고의 중간지역에 선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중간지대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입장이 주류인 사회이다. 어떤 경우든 입장을 분명하게 정하고 그러한 입장에 걸맞은 행동을 요구한다. 결코 변하지 않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은 용기가 있다고 한다. 사안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을 회색인이라고도 하고 기회주의자라고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마치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사익을 좇는 철새로 분류된다.

중간이 없는 곳에선 끝도 있을 수 없다. 오른쪽과 왼쪽은 연속선상에서 존재하고 중간이 있음으로 하여 양 쪽의 구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무색무취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중간이지만 중간의 역할은 양쪽의 존재나 차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사고구조에도 중간이 필요하다. 중간이 없는 사회에서는 양쪽을 연결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못한다.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는 일방적인 승패의 게임으로 얻어지지 못한다는 점을 안다면 극단을 아우를 수 있는 중간의 생각과 행동이 요청되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17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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