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국일보-삶과 문화] 지금부터 시작이다./김대환(관현악) 교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얼마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꿈이 뭐냐는 다소 생소한 질문을 받았다. 기자는 '마흔이 되어도 꿈을 가질 수는 있잖아요'라며 물었다. 세세한 목표와 계획만 떠오를 뿐 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100살까지 살겠다는 야무진 결심으로는 아직 절반도 살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가는 것에 불평만 하고 꿈은 잊고 있었다니.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어린 시절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신동으로 반짝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20세에는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빈곤한 생활과 암울한 현실 속에 있었다. 자살 실패 이후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한 그는 30대에 미국에 건너가 순회 연주를 갖게 되었다. 열광적인 청중의 반응과 달리 그의 기교적 결함에 대한 비평가들의 악평도 잇따랐다.

겸허히 지적을 받아들인 루빈스타인은 음악인으로는 꽤 늦은 40대에 연습에만 몰두하며 연주법 개선에 힘을 쏟았다.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로 50세에 유명 평론가인 올린 다운즈로부터 '6개의 손과 30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교에 관한 한 최대의 찬사를 받았다. 그의 연주는 70세 즈음에 가장 세련되었다는 평을 받았으니 그 앞에서 나이 탓을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발굴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6세로 명을 다할 때까지 하루 6시간씩 연습을 했다. 그가 죽기 1년 전, BBC 방송의 젊은 기자가 꾸준한 연습의 이유를 묻자 카잘스는 단순 명쾌한 대답을 했다.'연주 실력이 매일 조금씩 향상되고 있으니까요.'

창작 분야에서는 브루크너처럼 평범한 교사생활을 하다가 30대에 작곡가가 되거나 고갱처럼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일하다가 뒤늦게 화가의 길을 걷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신체를 이용하는 연주 분야에서는 나이가 들면 갖고 있는 실력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호로비츠가 말년에 연주한 우아한 리스트와 할머니 바이올리니스트 이다 헨델의 정열적인 사라사테를 동영상으로 감상하는 것은 감동 그 이상이다.

야구선수로는 환갑이라는 불혹의 이종범 선수의 선전이 반가운 것도 신체 나이를 정신력과 자기 관리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중계에서 이종범의 이름을 듣고는 '우리 대학 때의 그 이종범?'하고 깜짝 놀랐다. 은퇴하고 코치나 감독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서다.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때 그의 활약에 중립을 깨고 흥분하던 해설자에게서 노장 선수의 마음 고생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승 후 눈물범벅이 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울컥했다.

대학 때는 내가 응원하던 팀의 우승 기회를 여러 번 앗아가서 원망도 많이 했던 선수였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아름답게 은퇴하는구나 싶었던 그가 방송에 나와 야구를 계속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즈음에서 편하게 지도자로 전향하지, 성적 떨어지면 후회 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나 뿐이겠는가. 그러나 그는 시쳇말로 모양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좋아하는 야구를 끝까지 할 모양이다. 조카뻘 선수들을 제치고 이종범과 그보다 한 살 많은 양준혁 선수가 함께 내년 기대주로 기사에 난 것을 보았다. 용기가 대단한 멋진 선수들이다.

예전에 읽었던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곧 한 살 더 먹는다고? 괜찮다.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원문보기 :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opinion/200912/h2009121121472081920.htm&ver=v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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