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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삶과 문화]작곡가 정추를 생각하며/김대환(관현악) 교수

쇼스타코비치만큼 평생을 권력에 휘둘리며 살아온 작곡가가 있을까. 스탈린 시대를 견뎌야 했던 그는 새 곡을 작곡할 때마다 조국의 영웅이 되기도 하고 인민의 적으로 비난 받기를 반복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대학 졸업 작품인 교향곡 1번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까지 명성을 떨치며 순탄한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의 파격적 소재가 스탈린의 분노를 사서 위기에 처한다. 쇼스타코비치는 같은 분위기의 교향곡 4번 초연을 스탈린 사후로 미룰 정도로 겁에 질렸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5번 교향곡-혁명>을 웅장한 스케일로 작곡한다. 이 곡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한다고 느낀 스탈린은 45분의 연주가 끝나고 1시간 동안이나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하니 쇼스타코비치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의 인기는 다른 연합국에서도 치솟았다. 나치의 레닌그라드 침공 때 작곡한 교향곡 7번은 악보가 마이크로필름에 담겨 군함으로 수송되었고 토스카니니 지휘의 NBC 교향악단 연주가 미국 전역에 중계 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한숨 돌리는 것도 잠시, 승전기념 대작으로 기대되었던 교향곡 9번이 스탈린의 바람과 달리 다소 경쾌하게 작곡되자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악명 높은 '즈다노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술인들의 숙청을 지켜보며 총살 위협에 시달린 그는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주로 그의 선전용 음악을 작곡했고 이로 인해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 논란에도 천재 작곡가에 대한 서방세계의 존경은 변함이 없었다. 훗날, 유네스코 위원이던 바이올리니스트 메뉴힌이 기대에 부풀어 그를 만났는데 KGB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온 쇼스타코비치는 상상했던 거장의 면모와 달리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고 한다. 평생 삶의 명암을 반복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요즈음은 광고에서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접할 수 있다. 한ㆍ러 수교가 되기 전에는 그의 교향곡 5번을 듣기 위해 불법적으로 음반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이 옛 이야기 같다.

얼마 전 EBS에서 한ㆍ러 수교 20주년을 맞아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 하는 비운의 작곡가 정추를 다루었다. 광주 출생의 정추는 일본인 교관과의 다툼으로 퇴학을 당하나 음악에 민족의 혼을 넣어보라는 스승의 조언에 따라 일본 유학을 간다. 이후 월북해서 평양 음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북한 대사관에서 김일성 우상화를 규탄하고는 바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 일로 북한에서는 30년간이나 유학을 금지시켰다니 사건의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도주 중 작곡한 졸업 작품 <조국교향곡>은 유례없는 만점을 받고 가가린의 우주선 발사 현장에서도 그의 음악이 연주될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협 속에 정추가 흐루시초프에게 요청한 망명은 허락되었지만, 대신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다. 정추는 그 곳에서 존경 받는 국립 음대 교수로서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에게 구전된 한국 민요를 채집하고 우리 선율을 카자흐에 알리는 것에 힘써왔다. 남에서는 월북 음악인으로, 북에서는 반체제 인사로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했지만 조국을 잊지 못한 것이다.

최근 정추가 이슈가 된 것은 북한 체제를 비판한 카자흐의 저명인사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있어 그가 다음 타깃이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어디서나 자유로이 연주되는 시대이건만 86세 작곡가 정추의 삶의 굴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문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001/h20100129215506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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