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국일보-삶과 문화] 예술가의 연인들/김대환(관현악 전공) 교수

로댕의 작품을 직접 보고서야 아름답고 재능과 총명이 넘치던 카미유 클로델이 왜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생동감이 넘치는 로댕의 조각상들은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듯 했다. 죽음을 앞둔 이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깔레의 시민>에서부터 사진으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생각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로댕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한쪽에 마련된 카미유 클로델의 방에서 그녀의 사진과 조각품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진 속의 클로델은 그녀 남동생의 기억대로 '당당한 화려함이 빛나는 젊은 여인'이었다. 천부적 재능을 지녔던 클로델은 결국 로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외교관이자 시인이었던 남동생은 헐렁한 두건을 두른 채 병원에 누운 그녀를 보고 마치 '쓰레기로 버려진 조각상의 머리'같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했다.

로댕의 여성 편력은 평생토록 아내의 자리에 있었지만 로댕이 죽기 몇 달 전에야 법적으로 결혼한 로즈 뵈레에게도 끊임없는 상처였을 것이다. 로댕에게 있어 진정한 사랑이 언제나 다시 돌아갔던 로즈 뵈레였을지 아니면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카미유 클로델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가 지속적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대상은 조각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아니었을까.

클로델은 로댕과의 상처를 잊기 위해 젊은 작곡가 드뷔시를 만났지만 곧 헤어졌다. 로댕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해 클로델이 이별을 고한 드뷔시는 로댕이 근대 조각의 지평을 넓혔듯 근대 인상주의 음악을 연 인물이다. 거친 카리스마의 로댕과 달리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처럼 섬세한 취향을 지녔지만 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공통점도 있다. 드뷔시는 애인과 동거 중에 다른 이와 약혼을 하거나 아내를 두고 애인과 여행을 떠나는 등의 무책임으로 두 명의 여인을 자살기도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바니에 부인과의 불륜은 무수한 사랑의 노래를 낳았고 그가 첫 눈에 반한 뒤퐁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선물 받았으며 친구들마저도 멀어지게 한 에마와의 불륜의 도피행각은 <기쁨의 섬>을 남겼다.

예술에는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 혹은 실연의 아픔 속에 잉태 된 작품들도 많이 있지만 이처럼 여인의 눈물 위에 탄생한 작품들도 많다. 로댕이나 드뷔시처럼 오로지 자기 감정에만 충실했던 '나쁜 남자'가 이기적인 예술혼을 불태워 만든 작품들을 보면 종종 인간적인 갈등에 빠진다. 윤리적 잣대와 예술적 가치가 부딪히면서 그들의 작품을 마냥 좋아하는 것에 대해 찜찜한 마음이 솟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시절, 초여름 저녁이면 창문을 열고 드뷔시의 <달빛>을 듣곤 했다. 어스름해지는 아차산 길에 가로등이 켜지고 숲의 향기 속에 들려오던 그의 몽환적 음악은 마치 피터팬을 만난 웬디처럼 구름 위를 떠다니는 상상으로 이끌어 갔다. 뒷날, 수험생활에 많은 위로를 주었던 순수하고 섬세한 음악 주인의 사생활을 알고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파스텔 색채 같은 <달빛>을 들을 때마다 드뷔시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며 그를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 일까.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 사랑하든지, 아니면 예술가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한 뒤틀림 혹은 창조의 고통 속에 나오는 에고마저도 포용해야 하는 것이 감상자의 운명이다. 그도 아니라면 '나쁜 남자'에게 그런 재능을 주신 신을 원망할 수밖에.

원문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007/h20100716142548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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