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한국일보-삶과 문화] 차이코프스키 <비창>을 들으며/김대환(관현악전공) 교수
얼마 전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 때문에 게이가 된 아들이 에이즈로 사망하면 방송사가 책임지라'는 항의 광고가 신문에 실려 논란이 되었다. 성적소수자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굳이 그런 소재를 공영방송 드라마까지 다루어야 하느냐는 주장에 모두 공감이 간다. 동성애가 이렇게 TV 드라마에까지 등장하는 시대가 오니 성 정체성으로 평생 고뇌하다 생을 마감한 차이코프스키가 떠오른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시절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어머니와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0세 때 어머니와 떨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기숙사로 가게 되고 또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의 후유증으로 평생 어머니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성 정체성에 혼란을 갖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한 당시 러시아 정부의 분위기 속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오랫동안 자신을 흠모해온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살 소동을 벌이고 결국 파경을 맞지만 밀류코바가 원치 않아 법적 이혼은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15년이 흘러 차이코프스키의 명성이 한창이던 1893년, 그가 공 들여 작곡하고 연인관계로 추측되는 조카 보브 다비도프에게 헌정한 교향곡 6번 <비창>이 초연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지병이 없었던 데다가 국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서 콜레라가 전염병임에도 차이코프스키의 시신이 격리되지 않자 그의 죽음에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일생의 역작이라고 생각한 <비창> 의 초연이 실패로 끝나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1979년 법률학교 동창이자 고위관리의 미망인이 그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황제에게 알려지기 직전, 정부 고위층 동창들이 학교와 차이코프스키의 명예를 위해 그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일종의 '처형설'이다. 현재는 이 설에 가장 무게가 실리고 있다.

동성애자들을 유배 보내거나 사회에 발을 못 붙이게 한 러시아의 분위기가 오죽했으면 자살을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발레뤼스'를 창단한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처럼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나서 서구로 가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역사를 두고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디아길레프가 무용가 니진스키와의 연애와 결별로 희대의 스캔들을 뿌리던 20세기 초 파리는 동성애에 비교적 관대했던 것 같다. 당시의 프랑스 작곡가 프란시스 풀랑은 아마도 동성애 사실을 공개하고 활동한 최초의 음악인이 아닌가 싶다.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한 풀랑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 있던 동성애 천재 시인이자 한 때 살바도르 달리의 연인이었던 가르시아 로르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살되자 큰 충격을 받는다. 로르카를 추모하며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의 2악장은 전쟁의 비극을 그린 다른 악장들과 대조적으로 스페인 정취가 배어있는 아름다운, 그래서 더 슬퍼지는 음악이다.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이 초연되었던 10월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진 지금,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는 보편성과 자신만의 특수성 사이에서 평생을 노심초사하다 죽음으로 내몰린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이, 그리고 그의 음악이 사뭇 쓸쓸하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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