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기마민족의 스포츠, 격구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현재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 중 동물과 사람이 함께 경기를 하는 종목은 승마 한 종목뿐이다. 소득이 높아지면 승마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정설이라고 하지만 한국에서  승마는 현대 정치사를 바꾸는 사건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 재벌들과 연예인들의 스포츠라는 인식에 갇혀 대중들에게는 아직 먼 종목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집콕’이 장기화되는 지금, 평원을 달리는 스포츠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답답한 가슴을 조금은 풀리게 할 듯하다. 
이는 물론 기마민족이라고 불리던 우리의 멋진 기억을 현대적 감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이여성의 <격구도>                                                                                                   무용총 <수렵도>

 

한국에서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의 옛 무덤, 무용총의 〈수렵 서 경기를 하는, 기마민족의 기량이 그림 속에 넘친다. 도〉에서 마상 스포츠의 뚜렷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말에 올라탄 네 명의 인물이 평야를 누비며, 울리는 화살인 명적을 사용해 군사 훈련을 하는 장면이다. 털,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날개도 없는 작고 힘없는 인간이 말과 도구와 지능을 발휘하여 사슴과 호랑이몰이를 하면서 기량을 닦고 있다. 이들은 멋진 의복을 입고 깃털 달린 관을 써서 동물들과는 구분되는 문명의 힘을 보이는데, 뒤쪽에 더 큰 술을 달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교관인 듯하다. 사슴은 멋진 뿔을 지닌 튼실하고 큰 모습으로, 호랑이는 개만큼의 크기로 그려 그 힘과 용맹을 축소시킨 주술적 심성을 보여준다. 산 위로 크게 솟은 삼엽초의 위용 또한 대단하다. 

 

곤궁을 잊게 한 호쾌한 즐거움 
이러한 수렵과는 달리 말과 함께 대중 속에서 놀이로 발전한 스포츠로는 발해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 말기까지 행해진 격구가 있다. 격구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하여 중앙아시아를 거쳐 조선반도에 들어온 스포츠로 알려져 있는데, 4명의 선수가 한 팀이 되어 두 팀이 일정한 시간에 상대의 구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넣느냐로 진행된다. 이때 선수가 사용하는 채는 1m 정도의 장시라고 하는 막대기로, 막대기 끝에 달려있는 가운데가 뚫린 채로 공을 들어 올리는 방식이다. 공은 나무를 둥글게 깎은 것으로 표면에 붉은색 옻칠을 하거나 수놓은 비단으로 싸기도 한다. 선수들은 서로 다른 색 옷을 입었다고 하니 유니폼의 원조이다. 발해의 정효공주 묘실의 벽화에는 격구채를 든 인물상이 그려져 있으며 통일신라의 유물 중에도 격구채를 들고 있는 서역인 석상이 있다. 
무관들이 다스리던 고려시대 때 격구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정몽주의 스승인 목은 이색(1328~1396)은 격구의 즐거움을 눈에 보이듯이 그려냈다. “번개를 쫓아 나는 듯 말발굽도 경쾌하여라/바람이 일고 불이 달려 미처 보기도 바쁘니/거리에 넘친 사람들 모두 팔짝팔짝 뛰누나/나도 잔년의 묵은 질병을 다 떨쳐 버리고/반쯤 거나하여 말 타고 해는 저물어갈 제 돌아오니/의기 호쾌하여 곤궁을 다 잊었네” 
600년 전 시인이자 학자였던 그도 격구의 호쾌함으로 거리의 사람들 다 팔짝팔짝 뛰고 스스로는 곤궁을 다 잊고, 치맥(?)을 하여 반쯤 거나해졌다고 노래하니, 경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날리는 그 모습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인간사의 한 장면을 본다. 

 

왕들이 사랑한 스포츠 

조선의 태조 역시 격구를 사랑했으며, 제2대 임금 정종은 격구에 대해 “내가 무관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격구 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라면서 즐겼다고 한다. 또한 세종도 격구를 사랑하여 즐겼는데 신하들이 그 사치성을 이유로 금지하자는 의견에 “격구는 본시 무예를 연습하기 위함이요, 노는 것이 아니다. 무예를 연습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며 격구를 무관의 시험 과목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총포가 들어오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격구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정조 때 제작된 <무예도보통지>에서 격구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복원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말이 비단 남성만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세종 때에는 부녀자들까지 격구를 심하게 하여 조정 신하들의 원성 때문에 이를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홍도나 신윤복이 여성의 승마를 그린 그림이 많다. 단원 김홍도의 황해도 안능 지역의 현감 부임 환영 행렬을 그린 〈안능신영도〉에는 행렬하는 사람들 중에 승마바지인 ‘말군’을 입은 여성이 그려져 있다. 말군(襪裙)은 여성들이 말을 탈 때 입어 치마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치마 위에 입었던 겉옷으로, 통이 넓고 뒤가 트인 일종의 승마바지이다. 〈악학궤범〉에 여성을 위한 승마복 말군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말은 친숙한 탈 거리이자 놀이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화가 이여성은 〈격구도〉에서 강한 기세의 조선인의 혼을 표현하였다. 먼지를 일으키면서 철릭을 입고 채를 두르면한국에서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의 옛 무덤, 무용총의 〈수렵 서 경기를 하는, 기마민족의 기량이 그림 속에 넘친다.

 

 

복원된 격구의 모습

 

 

발해 정효공주 능의 벽화

 

                                   김홍도의 <안릉신영도>                                                                  악학궤범 속의 말군

 

평원을 달리는 상상 
말을 이용한 경주지만 전혀 그 본질이 다른 또 하나의 종목이 경마다. 기량의 최대치의 경합에 관중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스포츠 대회의 특성인데, 이 흥미를 최대한 끌어올려 돈을 거는 도박심리까지 합한 종목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경마장의 말들은 맹렬한 속도로 달린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서, 겁이 많은 본성 탓에 발주기가 열리면서 들리는 굉음에 대한 공포로, 조련 중 받은 당근과 채찍의 기억 등으로 무조건 코피를 흘리면서도 앞서기 위해 달린다고 
한다. 갇힌 울타리에서 행해지는 이 경주는 그 운영방식이나 기수들의 처우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계속 노출하고 있다. 조련되는 말의 신세에 관해서도 말이 많다. 1994년 사설 단체인 한민족전통마상무예· 격구협회가 격구를 복구했고, 전 세계 마필산업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몽고로 마상무예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하면서 서양의 폴로보다 더 기교를 필요로 하고 박진감 있는 격구가 역사 속의 민속이 아닌 정식 스포츠 종목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몽고의 대평원, 달리는 말의 호쾌함, 마상에서 벌어지는 기교와 훈련 등은 한류의 상승세에 어울리는 스포츠 콘셉트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의 역할을 로봇이 빠르게 대체해 가는 시대에, 전통적 멋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기마민족의 스포츠, 격구에 대한 상상은 코로나19가 불러온 장기 ‘집콕’의 대안적 상상일 듯도 하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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