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홍성걸 칼럼] 쏟아지는 대선공약들, 文정부 실패 반복 두렵다 / 홍성걸(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좋은' 정책은 바람직하고 실현가능한 대안들을 찾아 비교 분석하고 주어진 조건 하에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정책이라도 수단과 목표 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정책목표의 달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일견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정책들이 목표와 수단 간의 면밀한 인과관계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채택되고 집행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은 물론, 그로 인해 많은 국민이 큰 고통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과 동시에 '일자리 정부'를 자처하면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여 임금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했고, 문 대통령은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하여 연내 1만여 명에 달하는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공언했다.

 

물론 이 정책은 실업률을 낮추고 비정규직을 줄여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를 줄이면 그들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소망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기가 선하다고 결과까지 착하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 목표와 수단의 인과 관계가 면밀히 분석되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기 전인 2017년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수는 약 657만 8000여 명이었다. 4년 동안 그토록 비정규직을 없앴지만 2021년 8월 현재, 비정규직의 수는 806만 명을 넘어서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마찬가지다. 2017년 월 127만8000 원이었던 것이 2020년에는 152만3000 원으로 벌어졌고, 2021년에는 156만7000 원으로 격차는 사상최대로 커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재인 정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친노동 정부다. 공언한 바와 같이 공공부문에서는 비정규직을 약 20여만 명 줄였다. 그러나 최저임금의 가파른 상승과 주 52시간제의 도입 등 친노동 정책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워진 민간 부문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비정규직을 훨씬 더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공공 부문이 비정규직을 줄이면 민간 부문도 따라서 비정규직을 줄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정책 목표와 수단 간의 인과 관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겠지만 이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기가 더욱 어려워지면 당연히 정책을 수정했어야 했다. 최저임금의 한시적 적용 유예나 주 52간제의 실시 연기 등을 통해 민간의 부담을 줄이고 민간의 자율적 정규직화를 유도하기에 충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지 않은 것은 현실을 무시한 것이며, 그 책임은 오로지 정책담당자와 최종 정책결정자에게 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얘기하면 입만 아프지만 문재인 정부의 25차례에 걸친 부동산 정책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완전히 실패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징벌적 과세를 통해 부동산 매물을 내놓게 하겠다는 정책당국의 생각은 처음부터 목표와 수단의 인과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문제는 수많은 부동산 전문가들이 이를 지적했음에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25차례나 유사한 정책을 반복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결과는 지금 우리가 겪는 부동산 가격의 끊임없는 상승과 정책에 대한 근본적 불신, 그에 따른 계속된 추격 매매 등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문재인 정부가 그토록 위한다는 무주택 서민과 청년들은 내 집 마련의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대선 정국이 전개되면서 수많은 공약들이 제시되고 있다. 공약은 기본적으로 득표의 유불리에 따라 선택될 뿐, 치밀한 인과 관계의 분석이 부족하다. 또 다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책 목표와 수단 간의 인과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정책 과정에서의 인과 관계는 결코 정치인의 신념이나 결단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과 지식, 그리고 풍부한 정책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뉴스콘텐츠 저작권 계약'으로 저작권을 확보하여 게재하였습니다.

 

이전글 알키비아데스가 반면교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 / 박규철(교양대학) 교수
다음글 [너섬情談] 자동차와 비장소 / 이경훈(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