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국민*인 책다방 #10] 두 얼굴에 대하여

여기 광주 민주화 운동의 공수부대였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평범한 20대였지만 명령에 의해 차출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공수부대가 된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는 군대라는 집단의 특성상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그는 당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에야 자신이 ‘가해자’로서 끔찍한 일들을 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민중의 적이었으며,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악의 축이었다. 그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조차 죄스러운 명백한 가해자였다. 이후 그는 매일 밤 죄책감에 시달리며 당시 자신의 얼굴이 담긴 민주화 운동을 기록한 테이프와 사진들을 찾아 헤매는 강박증세를 보인다. 부정적 시선들과 죄책감으로 인해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행복한 가정도 꾸릴 수 없다. 시대적 상황과 우연으로 인해 가해자에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공수부대원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 <얼굴>의 주인공이다. 그는 명백한 가해자일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이 빚어낸 또 다른 피해자일까?

 

여기 사회주의자를 색출해내기 위해 고문을 행하는 경찰 최달식도 있다. 그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조서를 꾸미고 고문을 행하는 것은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이다. 사회주의자를 가려내는 것은 국가의 보안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일이며 그 자신에게도 아주 보람 있는 일이다. 그의 가족은 6.25때 이념전쟁으로 인해 몰살됐고, 분노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눈앞에서 사회주의자를 즉결처분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최달식은 사회주의자를 증오하며 경찰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자 색출을 위해 고문을 자행한다. 소설 <붉은방>의 주인공 최달식 역시 시대적 비극으로 인해 심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인 동시에 무고한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다. 우리는 비극적 시대상황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Q. 시대적 상황과 우연으로 인해 공수부대가 된<얼굴>의 주인공이 가해자라고 생각하나요 피해자라고 생각하나요?

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밤낮으로 강박증세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한 일이 아닌데도 그 날의 일을 자신의 죄로 생각하고 고통 받고 있는 거죠. 사실 그 모든 비극은 개인이 아닌 국가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잘못된 권력으로 인해 황폐해진 개인에 불과해요. 표면적으로는 가해자이지만 무고한 시민을 향해 폭력을 휘두른 국가로부터 상처받은 또 다른 시민일 뿐이죠. 저는 이 주인공이 가해자이기 보다는 피해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박: 저 역시 <얼굴>의 주인공이 또 다른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그 역시 이념사상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에 희생되었던 수많은 민중들 중 하나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였잖아요. 군인이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것은 불문율이죠. 전시상황에 있어서 명령불복종은 즉결 처분 대상이에요. 특히 80년 광주 당시는 준전시상태였기 때문에 군인인 공수부대원이 지시한 바를 이행한 것은 시대적 배경 상,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러한 점을 감안해 형사적 처벌이 아닌, 다른 방식의 책임부과가 필요하다고 봐요.

소: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소설 주인공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됐잖아요. 그런데도 사회적으로는 명백한 가해자이기 때문에 보호받지도, 위로를 받지도 못하는 상황이죠.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도 자신을 가두고 사회로부터도 외면 받아요. 그런면에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통 받아야하는 피해자일 수 있어요.

 

Q. 종규씨가 다른 방식의 책임부과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얼굴>의 주인공이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요?

박: 시대적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자신이 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형사적 처벌이 아니라 개인이 죄를 참회하고 이에 상응하는 봉사를 함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책임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개인의 치유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해요. 사이코드라마에서 과거 상황을 재연함으로써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처럼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개인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을 떨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소: 저도 그 방식에는 동의해요. 봉사를 통해 과거의 죄를 모두 씻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치유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피해자를 위한 봉사를 하거나 후원을 함으로써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주인공이 사회로부터 지탄받거나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가 한 행위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개인이 의도한 바도 아닐뿐더러 자신이 왜 이일을 해야 했는지도 모르고 세뇌와 억압에 의해서 한 일이잖아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우선이죠. 누군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면 그건 개인이 아니라 당시 정부나 우리 사회일거예요.

 

Q. 그렇다면 <붉은방>의 최달식 역시 시대적 비극에 휩쓸린 피해자라고 생각하나요?

소: 아니요. <얼굴>의 주인공과 <붉은방>의 최달식의 입장은 다르다고 봐요. 최달식은 자신의 의지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가해자죠. 최달식도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피해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인해 또 다시 가해자가 된 인물이잖아요. 최달식에게 트라우마는 자신의 죄의식에 대한 변명인 것 같아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도구일 뿐이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기제로서 과거 기억을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얼굴>의 주인공과 달리 그에게는 폭력을 되물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 최달식은 되물림을 선택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고 있어요.

Q. 그렇지만 최달식의 직업이 경찰이었잖아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르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사회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 즉, 또 다른 시대의 피해자는 아닐까요?

소: 그런 면도 있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최달식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고문 행위들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즐기고 있는 것 같이 보여요. 자신의 의지가 사회적 영향보다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박: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최달식에게는 자신의 임무를 피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었잖아요. <얼굴>의 주인공과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그 유명한 이야기도 있잖아요. 나치시절 아우슈비츠로 유태인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철도운전사 이야기요.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그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얼굴>과 <붉은방>의 주인공에 대한 판단이 다른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Q.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에 처한 개인의 행동을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소: 심판이라는 것이 과거 행동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인데 당시 상황을 완벽히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심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잘못된 시대가 만들어낸 쓰라린 기억의 역사를 평생 떠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단순히 ‘옳은 것’ 또는 ‘옳지 않은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심판의 날을 들이대기에는 그들이 가진 아픔이 너무 커요. 그 날 그 곳에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낱낱이 밝혀줄 진상규명위원회가 정식으로 세워지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 상처를 보듬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과거를 멋대로 심판하거나 평가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박: 우선 심판에 대한 개념정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벌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사회적 기회를 주는 것 역시 심판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는 심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 당사자들에게 심리적, 정신적 치유를 위해 사회봉사 같은 사회적 행동을 권한다거나 자아재판, 죄를 실토하게 하는 장을 마련해 재사회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해요.

소: 개인들의 행동에 대해 죄를 묻기보다 지시를 내린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할 것 같아요. 개인들은 각자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데 정작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종용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잖아요. 당시 개인들은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해있었죠. ‘살기 위해서’했다는 진술이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시 규명되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 시행하는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객관적 자료가 없는 것도 문제죠. 객관적 증거 없이 감정적인 판단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박: 그런 장을 마련하는 주체는 정부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규명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죠. 정부 뿐만 아니라 정부와 온 국민들이 힘을 합쳐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내가 당시 광주에 있는 대학생이었다면 많은 민중들과 함께 거리로 나왔을까요?

소: 그 날 광주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된 기사들을 읽고, 이 두 소설처럼 문학으로 그 날의 아픔을 마주하면서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돼요.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대학생으로서 직접 나섰을 것 같아요. ‘연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이예요.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그 현장으로 나갔을 거예요.

박; 저는 무장투쟁 전까지만 참여했을 것 같아요. 뜻이 아무리 숭고해도 방법이 잘못되었다면 그 뜻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 이예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것 같아요.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시위 활동과 같은 평화적 방법만으로도 민주화운동이 결실을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당시 대학생들이 사회변혁의 주체였던데 비해 현재 대학생들은 사회참여에 소극적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 과거와 달리 현재는 소통창구가 열려있어서 사회 운동에 대한 책임의식이 떨어진 것 같아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회변혁을 하지 않더라도 전문가나 NGO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여러 시각이나 입장이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대학생들의 소명의식이 떨어진 것 같아요.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여러 가지 창구를 통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대학생들이 굳이 나설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소: 저는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요. 지금 우리 세대는 당장 내가 뭘 먹고 살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어떻게 꾸릴지에 대한 개인적 문제만 신경 쓰기에도 복잡해요. 나라 걱정까지 하기가 버거운 거죠. 종규씨 의견에도 일부 동의하는게 과거에는 SNS나 소통창구가 없어서 내가 나서서 들으려고 노력해야만 알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알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식이나 뉴스가 많잖아요. 개인이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하는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뉴스를 아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충분히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죠.

Q.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박: 저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짧은 역사 속에서도 두 번의 성공적 정권교체를 민주적 투표를 통해서 이루어낸 것을 보면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죠. 최근 시위가 많이 발생하고 있긴 하지만 혼란과 시위가 많이 발생하는 것 자체도 의견표출이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려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죠. 최근에는 정보들이 넘쳐나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잖아요.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 저도 동감해요. 처음 언론을 공부하는 사람들만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언론인의 역량이 강화되면 사람들도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최근에는 SNS와 같이 미디어가 많이 발달하면서 모든 개인이 뉴스를 전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언론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온거죠. 개인 미디어가 여론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한쪽의 이야기만 듣지 말고 반대 시각도 볼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개인 미디어시대가 도래한 만큼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해요. 특히 과거 역사는 잘못될 경우 후손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해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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