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FF Magazine] 무제록, 그러나 영상매체에 대한 단상


디지털 시대의 영화표

선물로 영화표 교환권을 받았다. 언제부터인지 인터넷 예매로 미리 원하는 좌석까지 지정하여 영화를 보다보니, 직접 교환권을 들고 극장에 가기가 그렇게 번거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일련번호를 인터넷으로 등록하여 예매할 수 있는 교환권도 있건만, 이 교환권은 좌석 상황도 모른 채 극장 창구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그야말로 고전(古典)적인 예매권이었다. 그래도 보내준 분의 마음도 고맙고 최근 대기업이 주도하는 멀티플렉스 극장도 권태로워서, 오랜만에 고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충무로에 위치한 ‘서울 토박이’ 극장에 가게 되었다. 빈자리가 많을 것 같은 첫 상영 시간에 맞춰 갔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교환권의 사용은 까다로웠다. 개봉작은 한 주 지나서야 교환권으로 볼 수 있다는 말씀. 마땅히 볼 영화도 없기에 교환권은 다음에 사용하기로 하고 다른 영화표를 한 장 샀는데, 그래도 보람과 위로는 물론 기분까지 좋아지는 반가운 네 글자가 아직도 극장가에는 남아 있었다. 바로 ‘조조할인’. 비록 반값까지는 아니었고 영화도 그다지 재미는 없었지만, 한동안 누려보지 못했던 특권을 경험한 듯 기분은 좋아졌다. 얄팍한 감상주의일까. 충무로와 종로의 극장가를 즐기던 시절에는 영화표를 사는 것이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일찍 오면 조조할인을 받고, 사람이 많으면 길게 줄을 서서 운명처럼 주어지는 좌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였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이제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표 이야기를 해본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조금만 부지런하면 내 책상머리에서 좌석을 미리 결정하고 영화를 보러 간다. 좌석 걱정이 없으니 여유 있게 식사도 하고 상영 시간에 딱 맞춰 극장에 들어간다. 비단 영화표뿐이랴. 이 시대의 편리함은 우리 일상의 곳곳에서 때론 겁이 덜컥 날 정도로 순식간에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어쨌건 영화표를 사는 일은 참 쉬워졌다. 물론 이것이 요지는 아니다. 얼마 전 개봉 여부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를 볼까 하여 극장 사이트에 접속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인 만큼 상영 영화도 많았지만, 한 영화의 상영에도 소위 ‘기본형(필름 상영을 일컬음)’, ‘디지털’, ‘디지털 4K’ 1), ‘디지털 3D’, ‘디지털 4D’, ‘일반 아이맥스’, ‘디지털 아이맥스’와 같은 다양한 옵션이 있어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우리의 육안으로는 구별하기도 어렵다지만, 최대한 원본에 가까운 화질을 경험해보기 위해 평소 잘 가지 않던 극장에서 디지털 4K의 영화를 감상했다. 그런데 극장 상영의 플리커링(flickering, 필름 영사 시 화면이 깜빡이는 현상)을 아직 일종의 낭만으로 느끼는 나에게는, DLP 프로젝터2) 가 뿜어내는 무결점의 화면이 그다지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투명한 화질이 주는 시각적 아우라에는 사뭇 압도를 당했다고 고백한다. 어쨌건 관객이 좀 더 깨끗한 화면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나쁠 것 없다. 아니 무척 고마운 일이다. 다만 전문가인 나도 그 메커니즘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아무쪼록 각종 영상콘텐츠들을 보통 관객들이 자신의 희망에 따라 어려움 없이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영화표 한 장 살 때도 이제는 따져볼 것이 너무 많은 복잡한 세상이다. 이젠 조조할인보다는 화질은 물론이요, 입체감이나 촉감 등 감상의 몰입에 중요한 사항들이 영화표를 구입할 때 더 큰 관심사가 되었다. 게다가 레스토랑을 겸한 극장도 있다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편집자 주 :
1) 디지털 4K의 경우 최근 극장에 보급이 시작된 디지털 영사 기술이다. 디지털 영사기는 해상도에 따라 2K(2048X1080)와 4K(4096X2160)급으로 나뉜다 . 4K는 가정용 디지털 TV의 최대 해상도인 풀HD에 비해 4배 정도 높은 해상도를 구현한다.
지난해 국내에서는 최초로 메가박스가 전 상영관에 4K 영사 시스템을 도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 DLP프로젝터
DLP (Digital Light Processing) DLP방식의 프로젝터는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가 개발한 DMD칩
( Digital Mic romirror Device) 을 사용한 새로운 방식의 제품이다.
빛을 발하는 램프에서 발생된 빛이 컬러휠을 지나, DMD칩의 ON/OFF 반사에 의해 영상이 투사되는 방식
이러한 투사과정으로 인해 LCD방식의 동급 제품보다 명암비가 높은 특성이 있다.
매끄러운 영상, 입체감있는 그림 등의 표현에 적합하여 영상 및 영화등에 많이 쓰이고 있다.
영상매체: 욕망의 미디어
사실 나의 기억이 허락하는 가장 오래된 과거를 떠올려보면 지금과는 너무나 달랐다. 특히 디지털 방식이 사회 구조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은 2000년도 이후에는 매일매일 천지개벽으로 느껴질 만큼 콘텐츠의 변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영상매체는 특히나 변화의 체감도가 무척 큰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영상매체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두 축인 영화와 방송인데, 그 콘텐츠가 보여주는 세계는 나날이 신기해져간다. 실제 물리적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꿈같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단 이러한 영상 콘텐츠 자체의 진화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방식도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소위 ‘안경 쓰고 영화보기’를 촉발한 『아바타』(Avatar, 제임스 카메론, 2009) 이후 3D 상영은 보편화되었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촉각과 후각의 즐거움을 위한 4D 상영도 늘어나고 있다.
또 우리의 나안(裸眼)으로는 구별하기도 힘든 화질의 전쟁이 기술개발자들의 연구실이 아닌 우리 거실의 텔레비전 사각 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영화와 방송은 물론 게임과 통신, 인터넷을 위한 신기한 개인 장난감들도 속속 개발되어 이제는 드라마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에 들어가야 하는 일도 별로 없고, 막히는 차안에서 멍하니 창밖 풍경만 바라볼 필요도 없다. ‘미디어 액세서리(media accessory)’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물건들은 우리의 신체를 항상 치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건축물도 공간을 형성하는 단단한 구조물에서 미디어 파사드(media facade)와 같은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기능도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 실로 우리는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호모미디어쿠스(Homomediacus)’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영상매체의 발전에 대한 사례를 더 헤아려보자면 이 지면이 턱없이 모자랄 테고, 엔터테인먼트 산업 이외에 의학, 우주항공, 군사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상매체의 변화에까지 눈을 돌린다면 내 역량을 넘어서는 검토가 될 듯싶다. 그저 소박하게나마 내려 볼 수 있는 중간 결론은 영상매체의 기술발달에 지금 우리는 무척 매료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상매체가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현상이 비단 디지털 시대인 오늘만의 일일까?

본격적으로 영상매체가 진화하기 시작한 100여 년 전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1800년대 중반 시각매체의 혁명인 사진의 탄생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움직이는 그림(motion picture)’의 가능성까지 욕심내게 되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Auguste et Louis Lumiere)가 최초의 영화 카메라이자 영사기인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발명하게 되는데, 이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영상 혁명의 효시였다.
시네마토그래프는 약 1분 정도의 촬영이 가능한 필름 릴(film reel)이 장착될 수 있는 조그마한 나무 상자였는데, 이동이 간편했으며 촬영된 필름을 현상(現像)해서 다시 장착하면 영사도 가능한,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의 캠코더와 빔 프로젝터의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였다. 때문에 이 장치는 지구촌 곳곳의 신기한 풍경을 바로바로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내 줄 수 있었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이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실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을 포함한 시각매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사 시대부터 인간이 얼마나 이 세계의 재현을 갈망해왔는지 쉽게 알 수 있는데, 영상매체의 탄생도 이러한 욕망의 한 산물이었다.
100여 년 전의 사람들이 느끼기에 시네마토그래프의 탄생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영상 혁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충격적인, 어쩌면 기존의 세계관 자체를 뒤엎어 버린 사건이었다. 일례로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시오타(la ciota) 역에 도착하는 열차의 모습을 촬영해서 상영했을 때, 관람하던 사람들이 눈앞으로 달려오는 기차에 놀라 천막 밖으로 도망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당시 시네마토그래프의 촬영기사들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를 즐겨 촬영했는데, 사람들이 혹시 자신도 영화에 찍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영화관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색도 없는 화면에 사람들의 움직임도 우스꽝스러운 오래된 필름일 뿐이지만, 당시로서는 『아바타』의 3D 효과와 비교할 수 없는 시각 혁명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환영(illusion)에는 이미 익숙해 있지 않는가. (참고로 『아바타』의 3D 기법의 기본 메커니즘은 이미 1850년대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가 발명되며 완성되었다.)
 
텔레비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디지털 방식 이전에 많이 사용되던 브라운관의 메커니즘도 사실 1897년에 이미 발명되었으며, 1939년 영국에서 최초로 전파를 사용한 텔레비전 중계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방송, 즉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의 시대가 열렸다. 반 백 년 전 사람들이 최초로 뤼미에르 형제의 움직이는 환영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사람들은 개인 단위로 영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혁명에 흥분했다. 컬러텔레비전이 등장한 1950년대 초에도 사람들은 또 한 번 시각 충격을 경험했다. 가정으로 영상을 배달하는 텔레비전의 기세에 눌려 이제 극장은 없어질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기우를 갖기도 했으나, 다행히 아직 우리는 극장 문화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아니 극장 문화는 더욱 다채로워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발전은 이제 영상매체의 문화적 속성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제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영상매체의 발전 방향을 상상하고 예견해보는 시대다. 그리고 그 상상과 예측은 그 어느 시각매체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의 강한 욕망, 가령 더 생생한 것, 더 신기한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편리한 것 등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다시 영상매체 탄생의 주역 뤼미에르 형제의 시대로 잠시 돌아가 보자. 사실 시간적으로 본다면 뤼미에르 형제보다 1년 앞서 완벽한 동영상 재현 기술을 발명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발명왕 에디슨인데, 어째서 그는 ‘영화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뤼미에르 형제에게 양보하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 이면에 영상매체를 향한 욕망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탄생하기 1년 전인 1894년,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기계를 발명하여 영화 사업에 뛰어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크기가 작고 이동이 간편하여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촬영과 상영이 가능했던 시네마토그래프에 비하여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실내에서만 촬영이 가능한 설비였기 때문에 무용, 권투, 연극 등 제한적이고 연출된 퍼포먼스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기술적으로는 시네마토그래프에 비하여 월등히 부드러운 움직임을 재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키네토스코프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평생 한 번도 가보지 못하는 세계 곳곳의 이국적 진풍경들까지도 눈앞에 생생히 전해 주는 시네마토그래프를 능가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그림의 신기함에 매혹될 뿐이었던 사람들이 점차 그 매체를 향유하며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눈떴다. 즉 영상 그 자체의 시각적 신기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영상에 담긴 의미와 그것으로 인한 지성적, 감성적 만족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에디슨의 성과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진화의 흐름 속에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될 수는 있었지만, 영상매체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게 된 커다란 의미를 생성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고 뤼미에르 형제의 공덕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루가 다르게 영상 기술이 발달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욕망을 이 매혹적인 매체에 투사하고 있는 것일까?
 
매체의 융합에서 향유의 융합으로
요즈음은 스마트폰이 핫이슈다. 지난 4월 8일 기획재정부가 영화 『아바타』의 성공 사례를 예로 들며 2014년까지 콘텐츠·미디어·3D 산업분야에 27조 원을 투자하여 8만 명의 인력을 창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3D 영상콘텐츠가 국운(國運)을 좌지우지할 것처럼 온 나라가 들떴었다. 그런데 아이폰 열풍 이후 이제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소위 ‘어플’ 개발이 살길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벌써 할리우드에서는 3D 영화 제작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기술 개발에 대한 회의보다는 부족한 스토리를 시각 효과로 만회하려는 영화사들의 근시안적 정책을 지적하는 것이 그 회의론의 내용이다. 그러나 3D 영상 콘텐츠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자하겠다는 우리 정부로서는 그러한 회의론에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스마트폰과 그 어플리케이션의 장기적인 기술 개발과 더불어 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술을 향유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문화적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모두들 융합의 시대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 헤게모니의 두 축을 이루는 전통의 강자인 영화와 방송, 지난 10여 년간 무섭게 영역을 확장한 게임 산업, 다양한 콘텐츠의 유통-소비 생태계의 최강자인 통신 산업,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켜 미디어 퍼포먼스 등으로 진화하고 있는 공연예술, 그리고 미디어 파사드와 같이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변신한 도시 공간까지 이제는 모든 매체들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문화적 얼개 속에서 유기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욕망도 이제는 예전처럼 단순치가 않다. 놀듯 배우고(에듀테인먼트: education+entertainment), 즐겁게 치료받고(메디테인먼트: medication+entertainment), 재미있게 정보를 찾고(인포테인먼트: information+entertainment) 싶어 한다. 커뮤니테인먼트(communication+entertainment)도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이렇게 과거 서로 다른 DNA로 인식되던 영역들이 이제는 동시에 추구되며 문화 향유의 융합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물론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욕망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기술이 더 이상 매력을 갖지 못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욕망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만으로도 열광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이상을 원하며 에디슨의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한 전자제품회사가 개발한 휴대용 3D 카메라가 국내에서 곧 시판될 계획이라고 한다. 며칠 전 한 친구가 미리 확보한 기기를 보여주었는데, 안경을 쓰지 않고도 그 조그만 화면에 내 모습이 완벽히 3D로 재생되는 것을 보니 『아바타』도 곧 옛말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기술 개발의 광속도(光速度)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열광하던 3D 영상을 내 손으로 직접 찍을 수 있게 해주는 이 조그만 ‘똑딱이 카메라’가 보급되고 나면 우린 또 어떤 욕망을 품게 될까. 그림과 소리, 나아가 흔들림과 냄새까지 전해주는 영화에 만족하고 나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곧 안경 없이 3D 영화를 즐기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홀로그램과 같은 공간적 3D로 상영되는 영화도 나올 것이다. 더욱 감성적인 메시지들, 가령 향기나 온도와 같은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의 시대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을 둘러싼 모든 인위적 환경과는 물론 자연 환경과도 소통이 가능한 시대마저 올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들이 융합하여 또 어떠한 새로운 경험을 우리 인간들이 하게 될지 기대도 크고 그만큼 두려움도 크다.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새로운 영상매체의 변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어떤 시각 혁명보다 더욱 급격할 것이다. 이런 주제를 다룰 때 늘 빠지지 않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스티븐 스필버그, 2002)의 그 유명한 장면처럼 그동안 SF 영화 속에서 그려졌던 모든 신기한 기술들이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아닌 ‘수용(受容)’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용이란 ‘설득됨’을 전제로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새로운 영상 혁명들은 인간의 의지, 욕망, 필요 등 정신적인 채널과 그 주파수를 맞춰야만 복잡하고 미묘한 대중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힘쓰고 있는 것처럼 문화적 가치의 고양을 기술 개발과 반드시 병행해야만 한다. 아무래도 영화 『아바타』가 3D 영상 기술로 현대 YF소나타 16만 대 수출분, 아시아나 항공사 2009년도 매출액에 버금가는 경제적 파급 효과를 창출했다는 식의 지식경제부의 공식은 어딘지 조금 허술하게 느껴진다.
그 허술함을 메워줄 무엇인가를 찾아 차분히 쌓아가야만 소위 ‘콘텐츠 강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약속한 27조 원은 필요한 곳에 지혜롭게 쓰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 / 하준수(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영상디자인학과 교수)
하준수는 디자인과 영화를 오가며 다양한 매체로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은 논픽션영화 제작에 주력하고 있지만, 대학에서 공부한 제품디자인과 커뮤니테이션디자인, 대학원에서 전공한 영화, 그리고 가족의 내력인 회화적 요소가 작업의 형식과 양식 그리고 의미 속에 혼재되어 있다.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는 외규장각 문서의 반환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로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인 운파펀드를 수상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영상디자인학과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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