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추석특집 꽁트- 엄마한테 가는 날 / 박희팔(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81) 동문

엄마한테 가는 날

 엄마는 ‘다른 오빠’ 네를 몇 번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 번 갔었다. 그때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어디 가는 거야?”
 “오빠한테”
 “누구 오빠, 엄마오빠?”
 “희경이 오빠”
 “내 오빠 집에 있잖아.”
 “다른 오빠”
 당시 여섯 살 난 나의 소견으로는 무슨 말인지를 통 몰랐다. 그 ‘다른 오빠’ 네에 도착하자 나를 꼭 끌어안는 할머니가 외할머니라고 했고 엄마는 옆에서 나보다 키가 큰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으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가 엄마가 말한 나의 ‘다른 오빠’였다. 11살이고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우린 서먹서먹한 채로 별 말도 못 건네고 엄마 따라 나는 다시 그날 오후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이 추석 이튿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진 나를 보고 빙긋 한 번 웃었을 뿐 엄마와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오빠가 나를 불렀다.
 “‘다른 오빠’ 봤니? 어때 잘해 줘? 키는 나보다 작지 나보다 세 살 아래니까. 재밌는 말 많이 했어? 언제 한 번 같이 와 봐. 넌 오빠가 둘이지만 난 여자동생이 하나고 남자동생이 없잖어. 그래서 보고 싶어. 니 오빠믄 내 동생도 되니까.”
 오빠는 내가 대답하고 얘기할 틈도 주지 않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궁금한 게 많고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다른 오빠’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여하튼 뭐가 뭔지 헷갈리는 일들이었지만 어렸을 적이라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내가, 오빠 역시 ‘다른 오빠’이고 오빠가 엄마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내가 중학교 때 알았다. 추석날이었다. 차례상 위에 벽을 기대고 늘어서 있는 지방을 보았다. 입때껏은 그냥 넘어갔을 일인데 중학교 2학년 나이세가 되니 지방 속의 내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근데 여기 제일 끝에 있는 분은 왜 혼자셔?”
 좌측에 순서대로 계신 조상님들의 지방에는 한 장에 두 분 아니면 세 분이 나란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오빠가 얼른 나섰다.
 “그 분은 우리 엄마셔.”
 “우리엄마 여깄잖아”
 “응, 희경이가 인제 나이가 좀 들었구나. 이따가 오빠가 얘기해 줄게.”
 오빠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날 나는 오빠와 엄마로부터 내 존재위치의 자초지종의 내력을 들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는 금실이 좋아 보였다. 서로 상을 찌푸리고 다투는 걸 보지 못했다. 그 이면에는 아마 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나 행동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가령 이러한 것이었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 대해 순종적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그것이 비록 사리에 어긋나는 내용이고 반강제적인 면이 드러나 보여도 엄마는 늘 ‘예’. ‘그러지요.’ 였다. 그 댓가인지는 몰라도 아버진 엄마의 무언의 청을 잘 들어주는 것 같았다. 왜냐 하면 엄마가 어느 날 홀연히 나갔다가 홀연히 늦게 들어와도, 어쩌다 하룻밤을 지내고 와도 그냥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곤 했던 것이다. 엄마가 그럴 땐 어딜 갔다 오는지 뭘 하고 오는지 나조차도 모른다. 그럴 때의 나의 추측의 한계는 오직 하나에 국한한다. ‘그 다른 오빠 네를 슬그머니 갔다 오는 건 아닐는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60을 가까스로 넘기셨다 간암으로다. 암이라는 것이 스트레스가 발병의 주요인이라는데, 상처하고 새장가가고 엄마 다른 두 자식 길러 가르치느라 애 많이 타셨으리라. 아마 아내가 두고 온 자식에게도 신경이 많이 갔으리라. 그런 걸 알기에 엄마는 그간 병간호를 지극히 했을 터고 두 번 맞는 지아비의 주검 앞이라 그리도 슬피 눈물을 흘렸을 게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이고 오빠가 장가들어 두 자식 본 서른한 살 때다.
 엄마는 그 2년 후 돌아가셨다. 역시 간암이다. 그간 병을 참고 숨긴 탓에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상가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한 젊은이가 들이닥친 것이다.
 “우리 엄마를 내가 모셔가야겠소!”
 그 ‘다른 오빠’였다. 상주를 비롯한 상가의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이 엄마는 내 엄마이고 여기 엄마는 따로 계시지 않습니까?”
 아주 작정하고 온 듯 했다. 상복 입은 오빠가 그 ‘다른 오빠’ 앞으로 다가간다. 둘은 초면 간이다.
 “이보게 동생 진정하게. 나는 상주복을 입었고 동생은 상복도 입지 않았네. 그러니 내가 상주 아닌가?”
 “상복은 내 집에 있어요. 그리고 형님, 우리 집 동네 산에 벌써부터 내 어머니 가묘를 해놓았습니다. 모시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형님 말씀대로라면 형님은 어머닐 두 분 모시는 것이 되고 저는 한 분도 못 모시는 게 되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러는 게 아닐세. 마땅히 우리 집으로 개가를 하셨는데 우리 집 혼이 되셔야지.”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계신 우리 아버님 묘소 곁에 나란히 계셔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저도 떳떳하고 어머님도 돌아가신 여기 큰 마님에 대한 도리로 여기실 겁니다.
 둘은 한 치도 물러나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인제 내가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빠를 조용히 불러 고인 모신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 오빠 맘 이해하지만 저 오빠 말대로 합시다. 저 오빤 친엄마에 대한 한이 골수에 맺혀 있는 것 같지 않수?”
 상가의 분위기는 엉망이 됐지만 오빠가 한발 양보하는 단안을 내려, 발인은 여기서 하되 장지는 ‘다른 오빠’가 정한 곳으로 변경하기로 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게 지난 올봄의 일이다.
 그날, ‘다른 오빠’가 엄마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었다.  “희경이 너 올부터는 엄마 제사는 여기 와서 지내고 명절엔 거기서 차례지내고 나서 이리로 와 엄마 차례는 여기서 같이 지내자. 당장 돌아오는 올 추석부터 그렇게 하기로 해 알았지?”
 그날 나는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집에 와서 오빠도 나에게 조용히 일렀다.
 “희경이 애 많이 썼다. 아무리 엄마는 그리로 가셨어도 너는 이집 사람이고 내 동생이야 모든 가정예법절차는 여깃걸 따라야 한다. 알겠지?”
 이때도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오늘 엄마 가시고 처음 맞는 추석이다. 나는 엄마 지방 없는 차례를 끝낸 자리에서 식구들 앞에서 중대발표를 했다.
 “나 인제 엄마 차례 지내러 엄마한테 갈 거야. 앞으론 쭉 이렇게 하기로 했어!”
 그리곤 난 집을 나섰다. ♣
 

 약력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국민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교육신보 공모 1회 전국 학·예술상 소설 당선
△한국문협, 한국소설가협, 충북문협 회원
△뒷목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소설가협회장, 한국문협 서사문학연구위원, 동양일보 논설위원
△청주예술상, 청주문학상 수상
△콩트집 ‘시간관계상 생략’, 엽편소설집 ‘향촌삽화’, 연작소설 ‘바닥쇠들 아라리’, 장편소설 ‘동천이’ 등 발간.
 

원문보기 :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9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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