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10) 간판, 건물에 매달린 ‘아우성’/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전통시대와 결별한 현대가 가장 급속히 발전시킨 감각은 시각이었다. 특히 전기가 발명되면서, 밤은 단순한 시간 구분이 되었고 어둠의 신비는 추방되었다. 이후 20세기 도시의 삶은 유혹적인 전자 스펙터클로 자리 잡았고, 이런 도시에서 건물과 한몸인 간판은 문화수위를 보여주는 계측기가 됐다. 세계의 여러 도시 중 특히 한국의 간판은 간판 그 이상이다. 이들은 모두 다 너무 정감 있고, 너무 특이하고, 너무 화려하다. 그리고 같은 말을 너무 되풀이한다. 과잉이다. 그래서 피곤하다. 하지만 이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꼭 우리 한국인들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전통 시기에 선비들은 집이나 누각에 글을 붙여 의미를 부여했다. 휴먼 스케일로 제작된 현판, 주련 등에 집의 이름이나 교훈적 내용, 시구 등을 걸었다. 집은 이런 과정을 통해 단순한 인공물이 아닌 물격을 지닌 인문의 풍정이 되었다. 상가를 보면 육의전 등 관이 직접 운영하던 상점에서는 자신을 알릴 필요가 없었고, 장터에서는 물건이 곧 홍보물이었으므로 간판이 필요 없었다. 점을 치는 집에서 천을 매달고, 서서 술을 마셔서 선술집이라고 불리는 목로주점이나 색주가에서 등롱을 달아 주막임을 표시한 정도였다. 일본이 1908년 상표법을 통해 개인들에게 마크 및 상호의 독점권·배타권을 부여하면서 트레이드 마크가 등장했고, 이를 내걸고 과시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 되었다. 1910년쯤 조선의 낮은 한옥에 등장한 간판은 그야말로 대문짝만 한 크기였다. 대부분 흰 목판에 단색 한자로 이름을 쓰거나 냉면집에는 국수 가닥, ‘이 해 박는 집’(치과)에는 이와 잇몸이 그려지는 등 간단한 그림과 상호가 새겨졌다. 이 당시 조선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홍보용 입간판의 규모는 대단했다. 거리에서는 이런 큰 간판 사이에 알록달록한 작은 법랑 간판이 걸리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얇은 전구에 갖가지 색을 넣을 수 있는 네온사인이 들어와 진고개에 포진했는데, 이것이 조선인에게는 선망과 유혹의 대상이 되어 매일 단장을 휘두르며 이 거리를 오가는 산보객도 나온다. 하지만 김광균은 시 ‘와사등’(1938년)에서 네온이 일렁이는 거리를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로 비유하면서 도시 속 현대인의 고독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더 많게, 더 크게, 더 튀게

해방 후 간판은 함석판이나 목판, 철판에 페인트로 상호를 크게 써넣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은 이 모든 시설을 파괴했지만 다시 건물이 세워지고, 간판의 행렬도 다시 시작되었다. 1965년 서울 낙원동의 거리에는 극장 간판을 위시해 각기 다른 크기, 글자체로 상호와 업종만을 가로, 세로 제각각 달고 있는 간판들이 보인다. 형광등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1970년대가 되면서 아크릴 간판이 성행하기 시작해 50%를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네온의 형태나 글자 등을 표현하는 수준과는 다르게 간판 전체에 조명을 넣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국의 상점들은 색이 곱고 섬세하지만 전기료나 설치비가 비싸고, 크게 만들기 힘든 네온보다는 흰색의 형광등 빛을 통해 상호가 크게 부각되는 아크릴 간판을 선택했다. ‘한양 플라자’, ‘천지 부동산’, ‘대륙 상사’ 등의 상호가 간판 전체를 메운 디자인이 천편일률적으로 펼쳐졌다. 하지만 동네에 내걸린 연탄, 소금, 학생 회수권 등의 자그마한 간판들은 소박한 삶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했다.


1981년에는 88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었고, 1982년에는 미 군정 1호로 포고되어 36년간 지속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도시의 밤 문화가 시작되었고, 조명과 간판 시장은 확장되었다. 1987년 광고수익금을 올림픽기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버스광고를 시작해 가만히 서 있어도 달리는 차량 광고판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1994년 서울에 전자식 전광판이 빌딩의 꼭대기에 설치되었는데 거대자본이 필요했기에 대기업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도시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건물도 높아지고 사무실뿐만이 아니라, 기존에 가로의 저변부에 자리했던 마사지실, 이용실, 찜질방 등 서비스 업종들이 건물 층층이 입점했다. 이들을 위해 선팅 광고기법이 등장했는데, 이는 유리창을 일정한 색으로 가리고 그 위에 상호나 그림을 인쇄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를 통해 한 치의 여분도 없이 빽빽이 창문에까지 광고를 단 ‘간판 빌딩’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런 선팅 빌딩이 등장하자 이후 웬만한 빌딩들은 창문만 남기고는 어떤 여백도 없이 간판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법률 역시 이를 허용하고 있다. 이제 간판들은 옆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한 채 같은 원색, 같은 크기로 붙여졌다.

바탕이 없는 이런 원색의 빼곡한 글자들 사이에서 미학은커녕 눈에 띄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그러나 결국 실패하는 삶의 의지만을 보아야 하는 것이 한국 디자인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2000년대 값싸고 수명이 긴 LED 전구가 등장하면서 간판들은 반짝이는 총천연색의 띠를 두르거나, 아예 건물 전체를 빛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또 고해상도의 천연색 대형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선명한 음식, 스타, 상표 등의 커다란 사진이 붙기 시작했다. 외환 위기의 여파가 남아있던 이 당시 신촌에는 이런 사진 간판들이 ‘불타는 자갈밭에 춤추는 조개들’, ‘악을 써라 노래방’, ‘이러다가 망하지’ 등의 원색적인 용어와 함께 거리를 채워나갔다.

 

■키치 토템과 서구 사대주의 취향

현재 이런 간판의 물결 중에서 정점을 지키고 있는 것은 2000년대 중반에 등장해 진화하고 있는 에어 광고탑이다. 초기에는 선명한 형광색의 인형으로 등장해 거리에서 큰 키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이 시기 한국을 방문한 영국의 디자인 비평가는 한국 방문기를 간판 소감으로 대신했고, 이탈리아 디자이너는 이를 이용하여 전시 출품을 하고 현재도 사무실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번화가의 나이트클럽들은 빛으로 채워진 거대한 호박·나팔 모양의 유성기, 두꺼비 등의 에어 탑 조형물을 승용차 위에 올린 다음 몇 대씩 떼 지어 돌아다닌다. 이런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현란한 조명 아래 선글라스를 끼고 흰 양복에 붉은 와이셔츠를 입은 남성이 기선을 잡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40대 갑남을녀들의 춤이 한창이다. 주변 거리에는 환히 불을 밝힌 소머리, 버섯 모양의 해장국, 선짓국 에어 간판이 늘어서 있고 모텔에서는 LED 조명이 건물 전체를 타고 흐른다. 

이런 대형의 토템적 형상에 대한 선호는 행정부처도 마찬가지다. 지역 특산물인 복숭아, 인삼, 양파 등의 농산물을 싸구려 재질로 크게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 관행이다 보니 2층 높이의 감귤 가지가 버스 정류장에 설치되고, 가로등 위에 인삼뿌리와 가지모양의 전구들이 매달린다. 이러한 과장된 키치적 형상들이 주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우리 지역 혹은 우리 상점은 이것을 이용해서 당신들을 (경제적으로) 유혹하고 싶다.” 이렇게 지방 행정기관들이나 개인 업주들이나 똑같이 컬처노믹스의 토템을 세운 것이며, 선남선녀들은 그 주위에서 일상의 윤무를 출 뿐이다.


이러한 양태의 대극점에 삼성동 코엑스 몰이 있다. 근래 젊은이들의 감각에 맞추어서 리노베이션했다는 이곳의 간판은 발음조차 힘들다. 미색의 은은한 바탕 위에 까만색으로 DUFT & DOFT, MVIO, LUCKY CHOUETTE, CHILORIS, PORCHETTA, DEAN & LUCA, PAIN DE PAPA 등의 이름이 한글 하나 없이 늘어서 있다. 분명 시각적으로는 예쁜 데 선뜻 다가서기 힘든 광고판 속의 성형미녀들을 한꺼번에 보는 듯하다. 여기서는 40대 이상의 고객들을 찾아보기 힘들며, 이 공간은 중년을 위한 클럽이나 상점 간판들과는 모든 것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 젊은이들과 한 치의 대화도 할 수 없어 가끔 폭행 소동으로 뉴스를 채우는 세대 간 격차 혹은 서양풍으로만 존재성을 과시해야 하는 서구 사대주의의 기표로 읽혀진다. 또 하나의 간판 군이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2013년 평창 지역의 모든 돌출 간판은 눈사람 모양으로 바뀌었다. 동그라미 두 개로 된 이 작고 귀여운 눈사람이 떡, 전기, 방앗간, 쌀, 식료품, 담배 등의 근대적 일상단어를 달고 줄줄이 늘어선 이 광경은 일종의 희극적 비애감까지 느끼게 한다. 이런 획일적 간판 행렬은 특히 지방에 많은데, 이는 문화적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할 능력을 전혀 키우지 못해온 지난 70년 한국 현대사의 지표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민화

한 번 등장한 간판 디자인은 사라지기도 하고, 잔류도 하면서 복합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관통해 흐르는 원칙은 ‘더 많게, 더 튀게, 더 크게’이다. 이는 과시하고, 보이고, 소리 질러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한국인의 생존 전략과 닮아 있다. 근래에는 잘 다듬어진 간판이 또 하나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지만 여전히 작위적인 것들이 많아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간판에는 우리 삶의 갖가지 양상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 또한 지난 70년 동안 규제를 위해 기습적으로 간판 전선을 끊거나, 더 많은 현수막, 경고 설치물과 배너를 붙이는 등의 행정관행, ‘사형선고’ ‘유령’ ‘괴물’ ‘아귀다툼’ ‘꼴불견’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간판 비평들 역시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들 사이에서도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한 간판처럼 주인의 삶과 디자인 의지가 공존하는 간판들이 도심에서도 꾸준히 나타나기에 희망은 있다. 한국의 간판 사이를 걷다 보면 민화 속을 걷는 듯하다. 선비의 집에 당호와 시구가 걸릴 때, 서민의 집에는 떠돌이 화객이 그려주는 흔하디흔한 구복적 디자인, ‘뽄그림 민화’가 걸렸다.

현재 우리의 간판은 테크놀로지와 시장규모 1조원대의 간판 산업시스템, 개인의 치열한 생존의지가 자본을 둘러싸고 그려내는 우리 시대의 민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호흡과 속도가 진정되어가고 문화적 공감과 배려의 눈이 떠지면, 이 간판들 역시 스스로 잠잠해져 가지 않을까.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04194256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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