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서울시 디자인, 공간에 깃든 역사는 눈물 짓는다 / 조현신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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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비판적으로 보기 上 디자인이 힘인 세상이다. 디자인은 이제 외양이나 형식이 아니라 본질이자 내용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대대적으로 서울의 도시 디자인을 바꾸고 있다. 오 시장의 ‘서울 디자인’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동대문운동장 재개발에서부터 서울시청의 신청사 건축, 이른바 ‘한강 르네상스’ 계획까지 서울시가 추진 중인 도시 디자인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는 게 현실이다. 서울시의 디자인을 톺아볼 필요가 제기된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조현신 교수의 ‘서울시 디자인-비판적으로 보기’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서울시 디자인 정책의 실체 최근 서울시의 디자인 행정은 정책 담당자들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 시민들과 83년을 함께한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그 자리에 외국인의 건축물을 들여놓는다더니 세종로를 변경하고, 82년 역사를 가진 시청 본관의 신축 계획까지 본격 추진하고 있다. 또 ‘한강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국토 성형’ 작업은 지방자치단체에까지 급속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남양주시는 지난 3월 미국과 일본 등의 디자인 기획가들을 불러 ‘디자인도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경춘국도 변경을 위한 작업이다. 구체적인 장소성에 대한 식별이 결여되어 있는, 세계경제 11위국의 자존심에 걸맞지 않은 문화사대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급속한 성형수술이 부작용을 낳듯 이러한 작업은 국토에 부작용을 낳아 종국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소성에 대한 식별 필요 철거가 진행 중인 동대문운동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주변의 좁은 도로와 상점, 학교가 한 데 얽혀 조야하고 지저분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동대문운동장뿐 아니라 모든 공간에는 당연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한 시대는 자신들의 욕망과 언어를 국토에 표현한다. 그래서 국토는 쓰고 덧쓰여진 양피지처럼 흔적과 얼룩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국토는 하나뿐이고, 시대감각과 욕망은 바뀐다. 옛날 것과 지금의 것, 그리고 새것을 어떻게 공존시키느냐에 따라 한 도시가 깊은 울림이 있는 문화도시가 되기도 하고, 화장만 짙게 한 영혼 없는 도시가 되기도 한다. 현재 서울시가 추진하는 디자인 정책은 두 가지 면에서 지적을 받아야 한다. 첫째, 장소성에 대한 식별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지상의 모든 장소는 어머니의 자궁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과 우주에 대한 열망 그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다. 건물이나 장소에 삶의 기억과 체험, 일상이 쌓이면 그곳은 어머니의 품처럼 깊고 우묵한, 회귀하고 싶은 공간, 다시 체험하고 싶은 공간이 된다. 모든 것이 낯익고 익숙하여 일상의 신산함을 달래주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장소를 만드는 필수적인 조건은 시간의 축적이다. 시간은 무차별하게 흐른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모래시계와 낫을 들고 지상의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이에 대항하여 인간이 만든 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이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의 횡포에 맞서 인간의 가치, 역사, 전통, 기억 등을 어떻게 해서건 보존하고 지키면서 유한한 존재인 한 개체로서의 인간을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종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고 슬퍼한 이유는 그것을 만든 600년 전 조상들의 실체는 만나지 못하지만, 숭례문에 새겨진 그들의 미의식과 숨결을 만날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카이로스의 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현재 서울시에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고여 있는 곳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 현재까지 이어온 강북의 여러 지점들이다. 이곳을 어떻게 보존하고 사용하느냐는 것은 선조 때부터 이어온 공동의 기억과 체험을 어떻게 보존하느냐의 문제이고, 이는 곧바로 우리 후손과 우리가 만나는 실체를 어떻게 정할 것이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런 장소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우주적 공간’이다. 이 공간은 신기함과 탐험, 미래로 가득 차있는 반면 그만큼 낯설고 어색한 공간이기도 하다. 홍대 앞을 비롯한 동숭동, 기타 대학가 등이 이런 우주적 공간에 속한다. 앞으로 개발해야 할 공간이다. 상상력과 독특함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흐르고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언어와 세계와의 경쟁의 가능성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홍대 앞에 있는 KT&G 건물은 이러한 공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이 기이하고 낯선 건물이야말로 젊은이들의 우주적 공간 개념에 부합한다. 그런데 서울시가 진행하고 있는 디자인 정책은 이러한 장소성에 대한 식별 의식이 부족하다. 무차별적·수평적 개발을 추진하면서 낯설고 창의적인 것만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문화시대는 문화가 자본을 창출하고 산업의 기반을 이루며, 세계화 시대에서 지역성은 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동대문운동장 철거현장을 지나는 서울시민들은 가슴이 아리지만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필자도 동대문 야구장에서 야간경기에 열광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렇게 같이 공유한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실체감을 느낀다. 인도의 구즈랄 총리가 “인도의 국가를 듣거나 인도 음식을 먹을 때 나는 인도인임을 느낀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공유하는 물질적·공간적 증거가 없으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근대의 건물들 중 우리가 공유했던 자산을 함부로 고치거나 없애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일체감을 확인할 구체적인 물증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광수입과 스타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 두 번째는 스타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이다. 현재 서울시가 하는 모든 디자인 공모에 외국인이 끼지 않으면 당선되지 않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서울시의 디자인 기획은 외국 디자이너들의 ‘재능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공모를 통해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을 세우기로 한 후 지속적으로 홍보한 것은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이 만드는 관광수입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가 지은 이 건물은 탄광촌인 빌바오를 관광도시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화의 맥락과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인식을 보여준다. 일단 관광수입을 위해 삶의 기억과 체험을 깡그리 지우겠다는 구닥다리 경제주의적 발상도 문제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빌바오라는 장소성과 한국의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장소성을 수평 비교하여 동격으로 놓는 무지가 지적되어야 한다. 빌바오는 유럽 문화권이라는 세계적인 아우라와 함께 투우, 달리, 가우디, 그 외 한때 제국이었던 스페인의 문화적 축적이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유럽에 가면 당연히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을 보러 가게 된다. 하지만 자하 하디드의 건물은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성과 장소성의 맥을 끊고 지어지는 천재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가치가 없다. (게다가 자하 하디드는 그의 건물 안에 외국인이 돌아다니는 도면을 보내왔고 서울시는 그것을 멋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문화적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도면을 어떻게 버젓이 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달랑 자하 하디드의 작품을 보러 한국에 관광을 올 것인가? 만약 이런 논리라면 프랭크 게리가 지은 삼성의 리움 박물관, 독일의 유태인 박물관을 지은 리베스킨트의 삼성동 현대 빌딩, 해체주의 건축의 세계적 신예가 지은 을지로의 SK 사옥은 왜 그런 관광 수입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가? 서울시의 이런 행정을 보고 있노라면 소년·소녀들의 멋진 춤과 노래에 오빠부대를 형성하여 좇는 소녀들이 생각나는 것은 비약일까. 우리는 오빠부대 소녀들이 자신의 내면의 열망과 즐거움을 최대한 개성적으로 발휘하기를 원하지, 자신들의 정서를 감각적으로만 대변하는 어떤 아이콘들에 청년기를 바쳐 그들을 모방하고 그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우리가 같이 체험하고 열광하고 환호하면서 혹은 일상적으로 같이 쌓아놓은 기억의 축적물들을 천재 디자이너가 지은 건물 혹은 멋지고 과시적인 위용의 건물들에 빼앗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계적인 감각이나 비전을 우리 정서를 반영한 실체로 제공하지 못하는 건축계나 디자인계의 빈약함이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서울시의 디자인 기획인 ‘한강 르네상스’는 우리가 산업화 시대에 피땀으로 이룬 경제성장인 ‘한강의 기적’을 문화코드로 바꾸어 놓는 적합한 발상이다. 하지만 이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한국인이 이 땅에 이루어 놓은 삶의 흔적, 곧 한국인의 문화를 무시하면서 진행된다면 그것은 르네상스가 아닌 ‘문화 반달리즘’으로 평가될 것이다. 동대문운동장은 지금 부서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울시민이 83년간 공유해온 기억 역시 부서지는 파편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더이상 서울시는 시민들을 미래로만 내몰면서 문화가 고여있는 회귀 공간을 부수고 바꾸는 작업을 섣불리 진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어머니 품 같은 회귀공간에서만 우리가 누구인가를 되새기고, 기억을 통해 덧없이 사라지는 일회적인 삶을 다시 사는 기회를 갖고,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라는 자존을 찾고, 내일을 향한 힘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196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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