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전단지를 하나 내밀면서 불평을 합니다. 바로 얼마 전 아들녀석이 다니기 시작한 무술도장에서 이번 달부터 새로 입관하는 사람들에게는 강습료 대폭 할인에 도복까지 무료로 주겠다는 광고를 집집마다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복도 제 돈 주고 샀고 강습료도 깔끔하게 전액 현금으로 치른 우리는 완전히 손해 본 것 아니냐는 게 아내의 주장입니다. 아니 그건 틀렸어, 라고 저는 말해주려 했습니다. 우리는 도장에 등록하는 순간 계약조건에 합의한 것이고, 합의란 이 정도면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쌍방의 만족감에 근거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후에 조건이 바뀌었다고 우리가 손해 본다고 느끼는 것은 비합리적인, 억지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이런 요지로 대답해주는 대신 슬그머니 전단지를 접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즉흥적으로, 적정 강습료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 없이 무술도장에 등록시킨 것은 바로 저였거든요. 상담에서 등록까지 단 10분이 걸렸으니 '도복 공짜로 안주시냐'는 흥정 같은 건 당연히 생각도 못했지요. 상황이 위험할 땐 일단 피하는 것이 진정 합리적인 것입니다.
사실 아내의 억울한 느낌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의사결정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전망이론(prospect theory)과 공정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런 현상을 설명해 왔습니다. 행동경제학자들인 블라운트와 배저만은 1996년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첫 번째 그룹에게는 45분간 실험에 참여하면 7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45분 걸리는 실험에 참여하면 8달러를 주되, 그 중에서 임의로 선정된 몇 명에게는 1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해 보았습니다. 어떤 그룹에서 실험참여의사가 더 높았을지는 물론 여러분의 짐작대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공평하게 7달러를 받는 경우에 더 많은 참여의사를 나타냈습니다. (물론 두 가지 대안을 같은 사람에게 제안하면 어쨌든 금액이 더 많은 두 번째 대안을 고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비교대상이 있다는 데서 옵니다. 그 흔한 폭탄세일에 행복해지는 것은 굵게 X표 그어져 있는(그러나 가끔 의심스럽게 높은) 정상가 때문이고, 2등 하는 친구가 공부 못한다는 억울한 소리를 듣는 것은 1등이 있는 탓입니다. 이처럼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기준보다 많고 적은지가 때로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때로 합리적이지 않은 국민들의 마음을 만져주고 모아서 뭔가 해나가는 일을 우리는 '정치'라고 부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삼성, 웅진, 롯데- 이런 이름들과 과학비즈니스벨트, 경제과학도시, 미래도시의 청사진과 몇조, 몇십조 이런 숫자들이 등장하던 시간은 이제 어젯밤 즐거웠던 파티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숙취에서 깨어난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정부는 이제 원안이 불가피하며 아무런 +α 도 없다고, 그러니 모든 것은 원점이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수정안이 제시했던 낮은 땅값은 기업들에 다른 곳의 땅값이 너무 비싸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최첨단 과학시설을 약속 받았던 기초과학자들은 낡은 장비 앞에서 기운 빠져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이미 도장에 잘 다니고 있는 사람들 집에 대폭할인 전단지를 넣어 비교대상을 만들어준, 그래서 우리를 속상하게 한 무술도장 관장이 살짝 얄미워지기도 합니다. 그의 잘못이라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죄'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마치 요즘 정치인들처럼요.
원문보기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7011029190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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