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영국 록의 원류를 찾아서] 레넌·해리슨 사망 때 성 조지홀엔 끝없는 촛불 물결 / 조현진(미래기획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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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라인업과 새 밴드명을 갖고 비틀스가 처음 공연에 나선 곳은 리버풀보다 상대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고 밴드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독일의 함부르크였다. 60년 8월을 시작으로 비틀스는 62년 12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함부르크를 방문한다. 마지막 5차 방문 즈음에는 이들이 정식 발표한 첫 싱글 ‘러브 미 두(Love Me Do)’가 인기를 끌면서 비틀스는 고된 함부르크행을 피하고 싶었지만 계약상 어쩔 수가 없었다. 함부르크에서는 그야말로 연주의 연속이었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책 『아웃라이어(Outliers)』에서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 시간의 연습이 있어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비틀스의 경우 함부르크에서 일주일에 7일을 무대에 올랐고, 오르기만 하면 8시간씩 연주한 과정이 이들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비틀스는 엘비스만큼 커질 것” 예언 적중
리버풀의 역사를 소개하는 ‘리버풀 박물관(Museum of Liverpool)’은 2011년 개관됐다. 박물관 2층에 마련된 전시관 ‘리버풀 사운드(Liverpool Sound)’는 리버풀이 세계 음악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단연 비틀스다. 반나절 이상 걸리는 ‘더 비틀스 스토리’를 방문하기가 어렵다면 무료이자 스토리가 압축된 리버풀 박물관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15분짜리 비틀스 영화도 흥미롭게 제작됐는데 영화 제목은 히트곡 ‘옐로 서브머린’의 첫 가사인 ‘In the Town Where I was Born(내가 태어난 동네)’으로 리버풀을 간접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공공 건물 중 리버풀시청에서는 64년 비틀스 영화 ‘A Hard Day’s Night’ 개봉에 맞춰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무려 25만 명의 시민이 모였던 것으로 집계됐다. 84년에는 시청사에서 비틀스 멤버의 리버풀 명예시민(Freemen of the City) 선정이 발표됐는데 당시 시의회 의원 중 57명이 찬성하고 1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시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원형 구조의 중앙도서관(Central Library)에는 레넌과 매카트니가 처음 만났던 당일 공연의 프로그램과, 해리슨과 스타의 세례 기록 등이 보관돼 있다. 존 레넌이 40년 10월 9일 태어난 장소는 이제 더 이상 병원이 아니지만 비틀스 팬들이 꼭 찾아보고 싶어 하는 장소다. 레넌의 가운데 이름 ‘원스턴(Winston)’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출생 직후 레넌의 이모인 미미가 제일 먼저 병원에 달려왔다. 미미는 당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하며 급하게 달려왔다고 존 레넌 출생 당시를 종종 회고했는데, 공식 전쟁 기록에 따르면 레넌이 태어난 당일 오후 6시30분을 전후해서는 리버풀 지역에 특별한 폭격은 없었다. 친엄마인 줄리아는 레넌이 17세 때 교통사고로 숨졌는데 레넌은 훗날 여러 노래에서 이때의 아픔을 그렸다. 레넌은 유명 인사가 되어 리버풀을 떠난 이후 대다수의 친척과는 연락이 뜸해졌지만 실제로 자신을 키워준 미미에게만큼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 통화하며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엠파이어 공연 앞두고 세상 떠난 레넌 성 조지 홀 바로 건너편에는 1925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엠파이어 극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극장과 비틀스와의 인연은 57년 6월 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존 레넌이 이끌던 더 쿼리맨은 엠파이어에서 열린 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진다. 매카트니와 해리슨이 합류한 뒤 밴드명을 한때 ‘조니 앤드 더 문도그스(Johnny and the Moondogs)’로 바꾼 이들은 2년 뒤 엠파이어에서 열린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해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밴드는 결승 라운드가 열린 맨체스터시로 이동했는데 오디션이 당초 예정 시간을 지나 한없이 길어지면서 결국 맨체스터에서 하루 잘 돈이 없었던 이들은 원래 기차표를 버릴 수 없어 최종 오디션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고향 리버풀로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엠파이어 무대에 오른 62년 10월 28일, 이들은 더 이상 고개 숙인 청년들이 아니었다. 비록 로큰롤 초기의 전설적인 아티스트인 리틀 리처드의 오프닝 밴드로 출연했지만 비틀스는 이날 리버풀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65년 12월 5일 이들의 일곱 번째 엠파이어 공연이 비틀스의 마지막 고향 공연이 되리라고는 그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밴드 해산 이후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비틀스의 좌절과 영광이 교차한 이곳을 찾아와 솔로 공연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리버풀 전설에 따르면 존 레넌도 81년 1월 그 누구보다 만감이 교차하는 엠파이어에서 공연을 계획했다. 하지만 공연을 불과 한 달 앞둔 80년 12월 8일(바로 내일이다!) 살아생전 사랑을 외치고 평화를 노래한 레넌은 미국 뉴욕에서 네 발의 총탄을 맞고 난 뒤 영원히 자신의 고향 리버풀에 돌아오지 못했다.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으로서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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