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영국 록의 원류를 찾아서] 레넌·해리슨 사망 때 성 조지홀엔 끝없는 촛불 물결 / 조현진(미래기획단장)

비틀스의 활동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보여주는 ‘더 비틀스 스토리’ 건물 입구. 관람객의 70%가 외국인일 정도로 리버풀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됐다. [사진 조현진]

 

1956년 리버풀 출신의 존 레넌이 결성한 밴드 ‘더 쿼리맨(The Quarrymen)’은 더 캐번(The Cavern) 등 곳곳에서 연주하며 서서히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57년에 폴 매카트니가, 그리고 58년에는 조지 해리슨이 각각 가입한다. 이후 존 레넌의 친구 스튜어트 서클리프(Stuart Sutcliffe)가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그리고 피트 베스트(Pete Best)가 드러머로 영입됐다. 이러는 사이 쿼리맨은 몇 차례 이름을 바꾸다 최종적으로 비틀스로 이름을 확정한다.

이 라인업과 새 밴드명을 갖고 비틀스가 처음 공연에 나선 곳은 리버풀보다 상대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고 밴드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독일의 함부르크였다. 60년 8월을 시작으로 비틀스는 62년 12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함부르크를 방문한다. 마지막 5차 방문 즈음에는 이들이 정식 발표한 첫 싱글 ‘러브 미 두(Love Me Do)’가 인기를 끌면서 비틀스는 고된 함부르크행을 피하고 싶었지만 계약상 어쩔 수가 없었다.

함부르크에서는 그야말로 연주의 연속이었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책 『아웃라이어(Outliers)』에서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만 시간의 연습이 있어야 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비틀스의 경우 함부르크에서 일주일에 7일을 무대에 올랐고, 오르기만 하면 8시간씩 연주한 과정이 이들의 성공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비틀스는 엘비스만큼 커질 것” 예언 적중

같은 시기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라는 사람은 리버풀에서 넴스(NEMS)라는 음반 상점을 운영하며 음악 관련 기사를 언론에 기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61년 어느 날 그는 예기치 못한 현상에 직면한다. 단골 고객 레이먼드 존스가 ‘마이 보니(My Bonnie)’라는 곡이 실린 음반을 찾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에서 발매된 음반에 대해선 다 안다고 자부하던 엡스타인에게는 생소한 곡이었다. 존스 이후에도 다른 고객들의 문의가 이어지자 엡스타인은 이 곡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영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던 가수 토니 셰리던이 독일 현지에서 녹음하고 발매한 곡. 독일 내에서는 차트 순위 5위까지 올랐다.

그런데 엡스타인이 주목한 것은 셰리던이 아니고 이 곡을 녹음할 때 셰리던 뒤에서 연주를 맡은 밴드였다. 바로 비틀스였던 것이다. 비틀스는 61년 3월 두 번째로 함부르크를 방문하는데 이 시기에 셰리던과 친분을 쌓고 종종 협연도 하곤 했다. 이를 눈여겨본 독일 음반업체가 녹음을 주선한 것이다.

음반을 입수한 엡스타인은 비틀스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고 결국 몇 달 뒤 함부르크에서 리버풀로 돌아온 이들의 공연을 직접 찾아가 본 것이 61년 11월 9일 캐번에서의 연주였다(11월 23일자 ‘팝의 수도 리버풀 편’ 소개). 자신의 비서와 함께 공연을 지켜 본 엡스타인은 비틀스에 한눈에 반해 이들과 계약을 맺는데, 이날은 로큰롤에서 가장 축복받는 날로도 꼽힌다.

이후 거듭되는 음반사와의 계약 불발에 화가 난 엡스타인은 “언젠가 비틀스가 엘비스만큼 커질 것”이라고 외치며 음반사 문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비틀스에 대한 그의 신념일까 예언일까, 이 말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비틀스 초기의 형성 과정을 포함해 비틀스의 활동사를 파악할 수 있는 리버풀의 명소가 ‘더 비틀스 스토리(The Beatles Story)’다. 90년 개관한 이곳은 비틀스의 유품을 모은 박물관이나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기보다는 비틀스의 활동상을 스토리 형식으로 포장해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관이다. 캐번과 함부르크 등 비틀스의 주요 공연 무대를 재현했고, 멤버들의 출생부터 전성기, 해산과 솔로 활동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전시해놓았다. 지난해 25만여 명이 방문했는데 70% 정도가 외국인일 정도로 리버풀의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레넌 여동생 목소리로 오디오 가이드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올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 50주년을 맞이해 특별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10개 언어로 준비된 오디오 가이드 목소리의 주인공은 존 레넌의 여동생이다. 관광객의 흥미 유발을 위해 디테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성의는 K팝을 관광 상품화하려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비틀스 스토리의 홍보를 총괄하는 로라 살리스버리 이사는 “비틀스의 매력적인 스토리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기능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리버풀시의 관광산업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도 중요한 책임”이라고 밝힌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버풀 소재 유료 관광시설에서 비틀스 스토리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곳은 없다.

더 비틀스 스토리 건너편으로는 실내공연장인 ‘에코 아레나(Echo Arena)’가 들어서 있다. 2008년 음악방송 MTV 유럽 시상식이 개최된 장소로 당시 폴 매카트니가 ‘최고 영예의 레전드(Ultimate Legend)’에 선정됐다. 매카트니에 대한 시상 진행은 록밴드 U2의 보컬인 보노가 맡았다. 매카트니와 보노는 시상식장으로 함께 차를 타고 왔는데, 보노는 “음악적으로 존경하는 매카트니가 직접 운전하며 자신의 고향 이곳저곳을 하나하나 상세히 소개해줬다”고 얘기해 세인을 놀라게 했다.

 


1 2011년 개관한 ‘리버풀 박물관’의 외경.

2 ‘더 비틀스 스토리’의 마지막 전시 공간인 ‘존 레넌 방’. 그를 상징하는 흰색 피아노와 둥근 테의 안경이 놓여 있다.
리버풀 박물관의 최단시간 비틀스 투어

리버풀의 역사를 소개하는 ‘리버풀 박물관(Museum of Liverpool)’은 2011년 개관됐다. 박물관 2층에 마련된 전시관 ‘리버풀 사운드(Liverpool Sound)’는 리버풀이 세계 음악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단연 비틀스다. 반나절 이상 걸리는 ‘더 비틀스 스토리’를 방문하기가 어렵다면 무료이자 스토리가 압축된 리버풀 박물관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15분짜리 비틀스 영화도 흥미롭게 제작됐는데 영화 제목은 히트곡 ‘옐로 서브머린’의 첫 가사인 ‘In the Town Where I was Born(내가 태어난 동네)’으로 리버풀을 간접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공공 건물 중 리버풀시청에서는 64년 비틀스 영화 ‘A Hard Day’s Night’ 개봉에 맞춰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무려 25만 명의 시민이 모였던 것으로 집계됐다. 84년에는 시청사에서 비틀스 멤버의 리버풀 명예시민(Freemen of the City) 선정이 발표됐는데 당시 시의회 의원 중 57명이 찬성하고 1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시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원형 구조의 중앙도서관(Central Library)에는 레넌과 매카트니가 처음 만났던 당일 공연의 프로그램과, 해리슨과 스타의 세례 기록 등이 보관돼 있다.

존 레넌이 40년 10월 9일 태어난 장소는 이제 더 이상 병원이 아니지만 비틀스 팬들이 꼭 찾아보고 싶어 하는 장소다. 레넌의 가운데 이름 ‘원스턴(Winston)’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라 전쟁 영웅이었던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출생 직후 레넌의 이모인 미미가 제일 먼저 병원에 달려왔다. 미미는 당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하며 급하게 달려왔다고 존 레넌 출생 당시를 종종 회고했는데, 공식 전쟁 기록에 따르면 레넌이 태어난 당일 오후 6시30분을 전후해서는 리버풀 지역에 특별한 폭격은 없었다. 친엄마인 줄리아는 레넌이 17세 때 교통사고로 숨졌는데 레넌은 훗날 여러 노래에서 이때의 아픔을 그렸다. 레넌은 유명 인사가 되어 리버풀을 떠난 이후 대다수의 친척과는 연락이 뜸해졌지만 실제로 자신을 키워준 미미에게만큼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 통화하며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시민들의 추모 장소가 됐던 성 조지 홀.

엠파이어 공연 앞두고 세상 떠난 레넌

성 조지 홀은 리버풀의 아들들인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리버풀 시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촛불을 들고 모여든 시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리버풀은 ‘2008년 유럽 문화의 수도’로 선정되면서 1년 내내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는데, 첫 행사로 기획된 링고 스타의 1월 11일 공연도 이곳에서 열렸다. 링고 스타는 이 시기 ‘Liverpool 8’ 음반을 발표했는데, 리버풀이 1년 동안 축제로 물든 2008년과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지역의 우편번호가 ‘8’이었던 점 등을 중의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고향에 대한 경의를 담아냈다.

성 조지 홀 바로 건너편에는 1925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엠파이어 극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극장과 비틀스와의 인연은 57년 6월 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존 레넌이 이끌던 더 쿼리맨은 엠파이어에서 열린 한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진다. 매카트니와 해리슨이 합류한 뒤 밴드명을 한때 ‘조니 앤드 더 문도그스(Johnny and the Moondogs)’로 바꾼 이들은 2년 뒤 엠파이어에서 열린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해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밴드는 결승 라운드가 열린 맨체스터시로 이동했는데 오디션이 당초 예정 시간을 지나 한없이 길어지면서 결국 맨체스터에서 하루 잘 돈이 없었던 이들은 원래 기차표를 버릴 수 없어 최종 오디션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고향 리버풀로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3년 뒤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엠파이어 무대에 오른 62년 10월 28일, 이들은 더 이상 고개 숙인 청년들이 아니었다. 비록 로큰롤 초기의 전설적인 아티스트인 리틀 리처드의 오프닝 밴드로 출연했지만 비틀스는 이날 리버풀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65년 12월 5일 이들의 일곱 번째 엠파이어 공연이 비틀스의 마지막 고향 공연이 되리라고는 그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밴드 해산 이후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비틀스의 좌절과 영광이 교차한 이곳을 찾아와 솔로 공연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리버풀 전설에 따르면 존 레넌도 81년 1월 그 누구보다 만감이 교차하는 엠파이어에서 공연을 계획했다. 하지만 공연을 불과 한 달 앞둔 80년 12월 8일(바로 내일이다!) 살아생전 사랑을 외치고 평화를 노래한 레넌은 미국 뉴욕에서 네 발의 총탄을 맞고 난 뒤 영원히 자신의 고향 리버풀에 돌아오지 못했다.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으로서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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