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9) 유혹과 위험의 ‘동침’ 담배, 네 이름은 아이러니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담배처럼 양가적인 자연물은 없을 것이다. 짙은 프러시안 블루, 흰 연기 속에서 춤추는 무희 지탕(Gitanes·집시)과 전쟁터의 담배 골와(Gauloise)가 암시하듯 이들은 치명적인 그 수준만큼 유혹적이다. 그렇기에 세금, 가격 인상, 한 개비마다 계산되는 생명의 위험을 달래면서도 애연가들에게 담배는 버리지 못할 갈망이다. 영어 ‘시가렛(cigarette)’은 시가에 짧다는 어미 ‘-ette’가 붙은 것으로 짧은 시가라는 뜻이다. 1560년 프랑스 카트린 왕비에게 담배를 헌정한 장 니코에 의해 담배 성분은 니코틴으로 규정되었다. 한국에서는 말아 핀다는 뜻으로 궐련이라 불리기도 했고, 담배라는 이름은 토바코에서 담바고로, 담배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궐련은 1879년에 들어온 미국산 ‘히이로’였다. 개항 초 외국 담배 스포티의 ‘치표’(꿩표)에는 근사한 꿩이, 춘향을 염두에 둔 미인표의 ‘춘한(Chun Hyan)’에는 여인이, 백화표의 ‘화이트코스모스’, 화표의 ‘파라다이스’ 등에는 섬세한 꽃들이 장식과 함께 새겨졌다. 이런 장식적 패턴이나 꽃, 동물, 여성의 이미지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빅토리아 시기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홍안의 소녀, 순한 동물과 꽃 그림의 동양식 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이름을 단 이 화사한 서양 궐련들은 300년 역사의 조선 연초를 촌스럽고 미개한 것으로 만들면서 신문물과 개화의 상징이 되었고, 특히 도시에서 성행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의 담배전매령으로 100여개의 담배 회사가 정리된 후에는 일본식의 이름과 디자인이 횡행했다.

 

■양순한 동물과 꽃, 국가 발전의 디자인

해방 후 한국의 담배기술과 인쇄·포장술로 만들어진 첫 담배는 1945년, 10개비가 든 ‘승리’였다. ‘승리’라는 붓글씨체의 이름과 아무 장식 없는 바탕은 앞으로 승리정신으로만 채워가야 할 기술원점의 시대, 혹은 경쟁자 없는 독점공급 체제의 위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정부 수립 해인 1948년에는 ‘계명’이 나왔는데, 푸른 바탕의 지구 위 한반도에서 벼슬이 당당한 수탉이 목청껏 정부 수립을 외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담배의 이름과 포장 디자인은 대략 네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 동물이나 식물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디자인 방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은 ‘공작’ ‘백구’ ‘사슴’ ‘나비’ ‘백조’ ‘비둘기’ 등이다. 이들은 담배 연기에 기겁하고 도망갈 것 같아 오히려 사랑스러우며, 평화와 순수함, 우아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무궁화’ ‘백합’ ‘진달래’ ‘모란’ ‘금잔디’ ‘개나리’ 등 식물과 꽃 역시 순결, 부귀, 정열을 상징하거나 혹은 소박한 토종들이었다. 대부분 옅은 중성색 바탕의 중앙 상단에 이름을 쓰고, 도식화된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이 그 밑에 배치되어 있다. 당연히 지면에선 리듬감이 흐르지 않고, 대상의 본질이 표현되었을 때 주는 감성적인 즐거움 혹은 공감이 배어나오지 않는다. 이런 모양새는 1951년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가 디자인한 일본의 인기 담배 ‘피스’(peace)의 비둘기에 대한 한국적 해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조국이 앞으로 나가야 할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한 국가 디자인의 범주이다. 이들의 이름은 ‘건설’ ‘샛별’ ‘새마을’ ‘새나라’ ‘희망’ ‘자유종’ ‘상록수’ 등이었다. ‘납세로 경제개발을’의 슬로건을 단 ‘파랑새’는 연기를 내뿜는 공장과 굴뚝, 고층 빌딩, 포클레인과 남대문 등의 배열로 막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하는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간첩 책략을 분쇄하자’는 슬로건의 ‘새마을’에는 단순한 형태의 집과 나무가 나란히 배치돼 있으며, ‘협동 새마을’(1977)에서는 항만을 향해 쭉 뻗은 고속도로와 바다 위의 선박이 보인다. 그해 12월에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 수출 한국이 그려진 것이다. 1949년 국군창설기념으로 나온 ‘화랑’에는 육군의 별, 공군의 날개, 해군의 닻이 나란히 배치되어 하나의 심벌을 만들어 출발했으며, 이후 군 보급용으로 32년간 최장수를 기록한다.

세번째는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이름과 디자인으로, 이 역시 전통과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목적을 보인다. 1955년도의 ‘탑’을 위시해 1958년 최초의 필터 담배인 ‘아리랑’ ‘금관’ ‘파고다’ ‘한산도’를 거쳐 ‘청자’ ‘백자’ ‘단오’ ‘남대문’ ‘거북선’ ‘백두산’ ‘한라산’에 이어 총천연색의 사진 시리즈 ‘명승’이 등장했다. 이들은 대부분 푸른색이나 붉은색, 흰색 바탕의 배합이었으며, 역시 한글 고딕체 이름에 그림 하나가 들어갔다.

1970년대 담배이름을 넣어 유행되던 노래가 있다. “새마을에서 단오에 청자를 만나 거북선을 타고 개나리 만발한 한반도에서 명승을 구경하고….” 어떤 묘사도 없이 명칭으로만 이어지는 이 노래가 당시 디자인적 상상력의 수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흐른 지금, 이들은 가버린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친근함의 미학을 불러온다. 하지만 독점공급 체제에 국가발전의 사명을 띤 이 디자인들은 오직 담배를 싸는 최소의 수단과 소통을 위한 최소의 기호 역할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에게 감성과 유희를 부여해 줄 상상력 자체가 이런 체제에서는 흘러나올 수 없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도식적 포장지 중에서도 역사는 중층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청자’는 초고급 담배답게 전체 금박에 짙은 초록과 브라운의 대비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했고, ‘한산도’의 미색 바탕에 떠가는 하늘색 거북선 함대는 색채와 리듬의 즐거움을 주었다. 선정적인 빨강 띠를 두른 ‘단오’에서는 역시 빨간 치마를 입고 그네에 올라타는 신윤복의 여인이 낭창한 자태와 강렬함으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군부시대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았는지 2년 만에 사라지고, 1982년 롱 사이즈 담배 ‘장미’에서 금박의 장미 한 송이가 이 자리에 들어갔다. 또한 빨강과 주황의 옵티컬 아트 화면 가운데 흰색점이 가운데 빛나는 상대적으로 싸구려 담배 ‘환희’는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암시적으로 보여준 듯하고, ‘태양’은 드물게 색채와 비례의 완결성, 간결한 상징미를 보이고 있다.

 

■서양 담배와 비슷하게

1986년 9월에는 담배 시장이 개방되었다. 미군의 PX나 일본 밀수를 통해 보급되던 담배뿐 아니라, 담배 회사들의 본격적인 광고판, 간판, 선물, 공연 포스터 등이 담배를 둘러싼 시각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87년 담뱃세가 국세에서 지방세로 편입되면서 지방에서 벌어진 ‘내고장 담배사기 운동’으로 각 고장의 특산물과 관광지가 담뱃갑 한면에 컬러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기업체, 상점에서 회갑연까지 다 허용되어 ‘영도 횟집’ ‘정선 아리랑제’ ‘삼화만두’ ‘샘 다방’ ‘오빠 단란주점’ 등 경제적, 과시 목적의 이름들이 국가적 구호가 끝난 자리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4월에는 한국전매공사가 담배인삼공사로 전환되었다. 그해 선보인 ‘라일락’에서는 한글 이름이 작게 아래에 배치되고, 부드러운 필기체의 커다란 영문이 보라색·연두색의 감미로운 꽃을 달고 전면에 부각되었다. 서양 이름, 필기체가 주는 유연함, 천연색 색감 때문이었는지 외국디자인 같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88올림픽을 기해 하늘색을 주조로 빨간색·흰색이 배합되어 청량감을 주는 바탕색에 숫자 88과 고딕의 영문으로 EIGHTY EIGHT가 크게 부각된 ‘88 담배’가 나왔다. 1994년의 ‘디스’는 엷은 회색과 밝은 청색, 프러시안 블루의 배합이 그간 주종을 이루었던 빨간색 포장과 대비되는 지성적 느낌을 주었고 자유로운 글자체로 젊은이들에게 다가갔다. 이후 “아저씨 담배”라고 불리는 슬림 ‘에세’에는 대나무의 실사 사진이 선명하게 들어가는 등 청량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담배 이름은 글로리, 심플, 마운트 클래스, 겟투 등으로 바뀌면서 한글은 사라져갔다. 1998년 ‘시나브로’가 전통 음소 아래아를 쓰면서 등장했지만 곧 사라졌다. 

이 같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디자인은 흰 바탕을 주종으로 외국 담배포장과 흐름을 같이 하려 노력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전통적인 상징과 이야기들은 쌈지 담배 포장재인 ‘풍년초’ ‘하루방’ ‘학’, 수출담배 ‘여삼연’ 등을 통해 명맥을 잇다가 끊어졌다. 하지만 촌스럽다고 외면했던 색채와 문자체들이 요즈음에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우리 스스로 버린 지난 시대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한국적 감성의 코드들 

2002년 12월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민영화되어 KT&G로 바뀌었다. 그동안 금연 운동과 법률은 더욱 강고해져 갔고, 한국에 공장까지 갖춘 해외 회사들과의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한국 담배가 본격적으로 디자인실을 정비한 것은 이즈음이라고 한다. 2003년에 출시한 담배 ‘레종’은 고양이를 모티프로 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과거의 동물들이 지닌 순한 이미지보다는 차갑고, 분방한 도시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후 ‘디스 플러스’의 꽃과 고래, ‘디스 아프리카’의 ‘안알랴줌’ 카피와 개별 포장 등은 개항기 때 서구문물과 조우하던 조선적 문화인자가 뒤섞인 듯 유쾌한 디자인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2016년 말부터 담뱃갑 면적 30~50%의 크기에 흡연 위험 사진을 게재해야 한다. 적과의 동침처럼 매력과 해악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호주처럼 내년부터 영국 등에서 모든 담뱃갑은 하나의 우중충한 색, 하나의 디자인으로 통일된다. 담배 농가를 낀 산업시스템이 있고, 외국 담배와 경쟁해야 하는 한국산 담배는 이런 현실에서 당분간 자유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야 발랄한 감수성을 갖춘 한국 담뱃갑의 디자인은 그 능력과는 별도로 생명의 위험, 청소년 흡연 등의 파장 속에서 어떤 윤리성을 보여야 할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511271936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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