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너섬情談] 부동산과 반지성주의 / 이경훈(건축학부) 교수

도시 문제는 긴 호흡으로 준비하고 실행해야, 숫자 얽매여 주택만 찍어내는 개발 안 돼

부동산 가격이 뜨거워질 때마다 건축학 교수들은 초라해진다. 건축과 도시를 전공했고 세계를 여행했지만, 전문가 대접은커녕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기 일쑤이다.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이미 실패한 단지형 아파트가 끝없이 오를 것을 예측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계획, 그것도 부동산 정책을 전공한 동료 교수는 20여년 전 ‘부동산은 끝났다’라고 선언하며 비강남권을 고집하다가 요즘도 부인의 핀잔을 받는다고 고백한다. 케이블TV 경제 채널에 등장하는 부동산 전문가들의 현란한 분석과 전망을 대하고 나면 건축가나 교수는 이상과 이론에 사로잡힌 철부지 문외한처럼 보일 뿐이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다. 마치 주먹 잘 쓰고 다혈질이지만 ‘촉’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투박한 형사가 양복쟁이 먹물 엘리트 경찰을 압도하는 영화 줄거리와 빼닮았다. ‘교수가 뭘 알아’로 시작되는 일종의 반지성주의이다. 이론과 지성에 대한 불신, 감각과 욕망의 시장에 대한 확신은 굳어져 간다. 시장은 이제껏 패배한 적이 없다. 국토교통부의 대책이라는 것도 시장만큼 반지성적이다. 최근, 일부 지역 아파트값이 크게 오르자 관료들의 대책은 자금출처 증빙, 대출규제, 심지어는 가격 담합을 단속하는 특별사법경찰을 늘리는 등 대증적 처방을 쏟아내고 있다. 시장은 숨을 고르고는 다시 그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길어야 이번 정권의 임기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다시 정부가 빚을 내서 집을 살 것을 권할지 누가 알겠는가.

아파트 가격은 건축적 의미나 도시적 가치와 별개로 움직인다. 다양한 변수에 영향을 받고 초월적이며 자체의 시장 논리로 결정된다. 그것은 마치 주식시장이 기업의 경제활동과 별개로 자체의 금융, 경제적 논리와 법칙으로 변동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거시적이며 장기적인 흐름은 실제 기업들의 경제활동 추세와 무관할 수 없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이다. 전체의 추세는 장기적으로 실제 건축과 도시의 질과 연동된다. 부동산 시장이 일종의 머니게임의 양상으로 흐른다면 그건 이미 국토부의 소관이 아니다. 경제부처와 국세청과 금융 당국의 업무일 것이다. 당장 투기세력을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국토부는 긴 호흡으로 국토의 균형 발전과 질 좋은 주거를 공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일이다.

건축과 도시 전공자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들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첫째, 신도시는 강남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허허벌판의 그린벨트를 밀어내고 단시간 내에 지어낸 주거환경이 경쟁력 있는 주거환경을 갖기는 어렵다. 환경은 세대 내부와 녹지뿐 아니라 교육 문화 복지 일자리 등 도시적 편익까지 복합적이다.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딘 개발과 이어지는 신도시 발표에 2기 신도시 주민들이 반발하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둘째로 아파트가 단지 단위로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꿔보자. 초기 아파트 단지는 마땅히 공공이 제공해야 할 기반시설을 대신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공공을 대신해서 공원과 주차장과 심지어는 상가를 안에 만들고 주변과는 철저하게 분리해서 값을 높였다. 재건축의 시점이 도래해서는 배타적 담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문제를 재생산한다. 이제는 공공이 도시를 정비할 여력을 갖추었다. 대규모 단지를 해체하고 건물 단위로 도시에 녹아 들어가는 주거형태를 그리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동차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전하는 구도심을 현대적으로 재구조화하며 동시에 양질의 주거를 공급하는 길이다.

도시 문제는 정권 임기를 의식하지 말고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준비하고 실행할 일이다. 노태우 정권의 20만호 이래로 모든 정권이 그랬듯 숫자에 얽매여 주택을 찍어낼 일이 아니다. 5년은 신도시를 시작할 수는 있지만 다양한 이해가 얽힌 도시구조를 재편하기에 너무 짧다. 100년을 지탱할 집과 그보다 더 오래 남아서 우리 삶을 결정할 도시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3년 전의 촛불은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어눌함 뒤에 진심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배신감으로 시작되었다. 봉건적인 인간관계가 움직이는 체제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선출한 반지성주의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표현이었다. 이제 계몽의 강을 건너서 이성의 횃불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의연하고 묵묵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라는 괴물도 움츠러든다.

원문보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19206&code=11171426&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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