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정부수립 60주년]분단·식민 아픔 어디가고 ‘성공의 역사’만 남았나 / 신주백 (한국학연구소 박사급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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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위험한 현대사 인식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광복절과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논쟁은 학문의 기능을 사실상 배제시킨 채 정치화되어 이념 갈등과 사상 검증의 차원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정치적 지형의 측면에서만 보면 2008년 8월15일의 건국절은 김구와 김규식 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1948년 8월15일의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건국절 논란의 불씨를 지핀 것은 1995년 1월부터 ‘거대한 생애 이승만’이란 제목의 연재기사를 게재한 조선일보였다. 논란의 불길은 2004년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색깔 공세, 2005년 결성된 교과서포럼이란 신우파 단체의 현행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역사 인식 문제를 둘러싼 불길은 학교 교육의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번져갔다. 마침내 2008년 ‘대안교과서’를 표방한 교과서포럼의 ‘한국 근·현대사’란 책이 출판되면서 논란의 불씨를 제공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 압축적으로 드러났다. ‘건국절’ 논란은 이들과 같은 인식을 갖는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표출된 하나의 사건이자 본격적인 역사논쟁의 시작에 불과하다.
‘건국절’과 광복의 과정 8월15일을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이 공개적인 논란거리가 된 것은 ‘한국 근·현대사’란 책의 편집을 주도한 이영훈 교과서포럼 공동대표(서울대 교수·경제사)가 2006년 8월1일자 동아일보에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글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기고문에서 몇 해 전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보고 느낀 광경을 회고하면서 ‘국민주권’을 선포하고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 건국의 문명사적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1948년 8월15일은 진정한 의미의 빛이 찾아온 날이고, 1945년 8월15일 광복은 그다지 흥분되지 않는 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영훈을 비롯한 신우파가 1945년 8월15일의 광복을 홀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우리가 벗어난 과정에 대한 인식, 달리 말하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에 대한 이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신우파는 미국이 일본에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광복할 수 있었지만, 광복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본다.
이들은 광복관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한 언급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연합국이 승리한 싸움으로 중국의 항일전쟁과 소련의 참전도 일본이 패전한 이유에 포함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미군 및 중국국민당군과 협조했고, 조선의용군이 중국인민해방군과 협력했으며, 만주의 유격대가 소련군의 지휘를 받았던 사실도 연합국이 침략국과 싸운 전쟁이라는 정황과 연관지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해외의 3대 항일무장대와 국내의 민족운동 세력은 1945년 8월15일 바로 그날에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지 몰랐을 뿐이지, 일본이 아주 가까운 장래에 패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저항을 계속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장문의 ‘건국강령’을 제정했고, 조선의용군이 만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고자 했으며, 빨치산 유격대가 조선공작단위원회를 결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여운형이 1944년 서울에서 결성한 단체의 이름도 ‘건국동맹’이었다. 주지하듯이 건국동맹은 8월15일 직후 전국에서 결성되어 우리의 자치역량을 보여준 건국준비위원회의 모태였다. 최소한 우리를 이끌 지도자들에게 8·15 광복은 준비 없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8월15일 광복을 우리가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힘으로 쟁취한 것은 아니다. 연합국이 이탈리아, 독일, 일본이란 침략국으로부터 승리한 결과였다. 그런데 침략국의 지배를 받던 세계 민족과 국가 가운데 그들이 항복할 때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경우는 없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다. 연합국에 의한 광복이라는 측면만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민족운동 세력도 반일연합전선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건국절’과 임시정부 계승
신우파는 국민주권을 선포하고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의 건국이 한반도 역사에서 문명사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출현을 문명사적 측면에서 의미를 규정한 그들의 지적은 우리 역사를 새로운 측면에서 조망하고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에 이미 보장된 가치라고 본다. 실제 헌장에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양심의 자유만이 아니라 언론·출판·집회·결사·소유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다. 1919년 이후 거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는 민주공화주의를 독립 이후 추구해야 할 이념으로 규정했다. ‘건국강령’은 이를 가장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규명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한 1948년의 제헌헌법에서도 이를 계승했다. 이에 대해 신우파는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이므로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면 되는 것이고, 법적 실체적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48년이라고 본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실과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실체가 1948년에 들어선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신우파의 주장이 제헌헌법의 규정을 충분히 해명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헌법의 전문에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9년에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1948년에 ‘재건’했다는 규정은, 1948년 8월15일을 ‘정부수립일’로 보아도 국가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광복과 건국을 선택적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한국의 건국일을 무조건 비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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